[정문태의 제3의 눈] 9/11이 남긴 유산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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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10   |  발행일 2021-09-10 제22면   |  수정 2021-09-10 07:07
군비 폭증·테러·반무슬림에
인종차별·전쟁 일상화까지
인식체계·삶 바꿔놓은 9/11
美발표 전모가 불신 도화선
온갖 음모론·불확실성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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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 전문기자

내일이 9월11일이다. 2001년이었으니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우리 언론이 '9·11 테러'로 불러온 사건이 터진 날이다. 이날을 외신이나 국제 언론은 군더더기를 빼고 '9/11'로 써왔다. 외신에서 특정 사건을 날짜로 부르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기호로 날짜를 매기는 경우도 아주 드물다. 매체마다 특성도 이념도 달라 9/11로 써온 까닭을 하나로 뭉뚱그리긴 힘들지만 개념이 또렷하지 않은 테러란 말 대신 상징적 표기법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다른 말로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납치한 비행기로 자본주의 상징인 월드트레이드센터와 무력의 심장인 펜타곤을 때려 부순다는 건 할리우드 영화판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 더구나 9/11은 기다렸다는 듯 생중계를 통해 온 세상에 실시간 배달되었다. 세계시민사회는 그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면서 '이 세상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로부터 세상은 9/11 전과 후로 나누어질 만큼 급변했다. 9/11 뒤 폭증한 군비, 테러, 반무슬림, 인종차별 그리고 전쟁의 일상화는 시민의 인식체계뿐 아니라 삶까지 바꿔놓았다. 하여 9/11을 앞둔 오늘 지구적 현상 같은 거대담론은 제쳐두고 본보기거리로 내 일상의 변화를 짚어보았다.

무엇보다 도드라진 건 내가 몸담은 외신판의 용어였다. '테러와 전쟁' '테러 경보' '악의 축(테러 지원 정권)' 같은 신조어가 등장했고, 전쟁과 상관없는 기사에도 핵 폭심지를 가리키는 '그라운드 제로' 같은 군사적 용어가 지나치게 자주 올랐다. 언론이 현실을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달리 거친 무장철학을 부풀리고 퍼트리는 불길한 징조임에 틀림없다. 외신판이 용어를 가려 쓰던 9·11 전과 크게 달라졌다.

그다음은 취재를 다니는 내겐 공항의 변화가 크게 다가왔다. 내남없이 여행객을 아예 잠재적 범죄자처럼 다루는 검색대와 출입국 심사대에 익숙해지기까지 적잖은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9/11 뒤 나는 단 한 번도 편한 맘으로 공항을 드나든 적이 없다. 전신 스캐너를 거치고도 걸핏하면 온몸에 손을 대는 검색대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9/11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결국 출발 1시간 전 공항에 닿아 국제선을 타곤 했던 내 느려터진 버릇이 사라진 것도 9/11 뒤였다.

하나 더, 커피숍 대화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과 마주 앉으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게 음모론이다. 9/11 전만 해도 음모론은 몇몇이 들고 다녔고 그 주제도 '누가 케네디를 죽였는가' 수준이었는데, 이젠 웬만한 이들이 저마다 입에 올리는 실정이다. 그 화두도 환경, 금융, 바이러스를 비롯해 신세계질서에서 전체주의 세계정부에 이르기까지 더 폭넓고 치밀해졌다. 이 음모론의 폭발은 말할 나위도 없이 9/11에 대한 불신감이 도화선 노릇을 했다. 미국 정부가 밝힌 9/11 전모란 게 여전히 꺼림칙한 구석이 많은 데다 2011년 9/11 주범이라던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해서 곧장 바다에 버렸다는 발표가 더 깊은 불신감을 키웠다. 게다가 관타나모 미군 기지에서 고문 학대를 당한 끝에 9/11 범인으로 찍힌 이들은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법정 판결도 없는 구금상태다. 이런 의혹을 풀어주지 못한 언론에 대한 반감을 먹고 자란 게 바로 음모론인 셈이다. 언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매섭게 물어야 하는 까닭이다. 저마다 경험은 다르겠지만 9/11 뒤 세계시민사회는 불편한 변화를 익히며 다가오는 정체불명 내일 앞에 서성이고 있다. 더 깊고 더 외로워진 불확실성의 시대, 9/11이 남긴 유산이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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