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엽의 한자마당] 송구영신을 생각하며

  • 이경엽 한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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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7   |  발행일 2022-01-07 제38면   |  수정 2022-01-07 08:39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듯, 묵은 나를 보내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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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여느 때처럼 떠오르지만 새해를 맞는 날의 해맞이는 특별하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로 한 해를 마감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묵은해와 함께 보내고 무엇과 함께 새해를 맞아야 하나 생각해 본다.

송고영신이란 낱말부터 살피자. 중국 후한의 반고가 편찬한 전한 시대의 역사서 '한서(漢書) 왕가전(王嘉傳)'에 '송고영신'이란 말이 나온다.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북송의 서현은 '제야'란 시에서 "한겨울 밤 등불은 깜빡이고 시간은 느릿느릿한데,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 일은 어김이 없구나"라고 송고영신의 감회를 말한다. 서현이 보내고 맞이하는 것은 왕가가 말한 구관과 신관이 아니라 아마도 시간과 세월을 가리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송구영신을 '송고영신'에서 왔다고 말들을 한다.

중국에서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을 '사구영신(辭舊迎新)'으로 많이 쓰는 듯하다. 辭(말 사)는 말과 함께 사양하다, 사직한다는 뜻으로도 쓰이나 여기에서는 '이별하다, 작별하다'는 뜻이다. 일본은 해를 넘긴다는 뜻의 '도시코시(年越し)'로 의외로 담백하게 쓰니 한자문화권인 동양 삼국의 낱말 사용이 재미있다.

우리가 송구영신이란 낱말을 언제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말로 썼는지 자세히 알 수 없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본다. 인터넷에서 실록을 검색하니 송구영신이란 낱말이 모두 20회 나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해 바뀜과 관련한 뜻이 아니다. 모두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하는 의미로 쓰였다. 송고영신이나 사구영신이란 말은 아예 보이지조차 않는다. 언제부터 송구영신이 연말연시를 대표하는 우리의 사자성어가 되었나. 송구영신이란 한자어의 유래와 근거가 어디에 있든, 말이란 그 쓰임이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 해마다 쓰는 이 말을 굳이 사시로 볼 필요는 없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대체로 쉽게 그 뜻을 이해하니 앞으로도 충분히 우리 곁에 살아남을 낱말로 보인다.

송구영신의 정점은 아무래도 제야(除夜)의 종과 원단(元旦)의 해맞이일 것이다. 제야는 제석(除夕)과 같은 말로 한 해를 걷어 내는 날인 제일(除日)의 밤을 가리키니 어둠을 밀어낼 듯한 쟁쟁한 종소리가 이 밤의 연례의식에 어울린다. 다만 지난해는 코로나19로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새해 2022년은 호랑이해이므로 해를 맞이하는 영일만(迎日灣)의 호미곶(虎尾串)이 말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기 제격이다. 원단의 해맞이를 놓쳤더라도 해는 하루도 미루지 않고 떠오르고, 장소가 어디든 햇살을 비춘다. 해맞이가 언제 어디에서나 가능하듯 송구영신 역시 언제나 어디에서나 가능하리라. 그래서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란 말이 생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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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엽 (한자연구가)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있지만 구관을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하듯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자. 세상사를 남 탓으로 돌리기보다 내가 가운데에 서야 한다면, 구관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묵은 나를 보내는 것이 옳다. 신관을 기다리기보다는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게 더 당당할 것이다.

자기를 송고영신하고 자신을 송구영신하는 것이 혼탁한 시대의 새해를 대하는 떳떳한 자세이리라.

한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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