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8] 승려 서예가 탄연 "연꽃이 못에서 나온 듯"…12세기 고려 절정의 귀족적 세련미 녹여낸 서풍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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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6   |  발행일 2022-05-06 제34면   |  수정 2022-05-0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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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연의 원응국사비 탁본.

탄연(坦然·1070~1159)은 고려의 승려 서예가다. '신품사현(神品四賢)'에 오를 정도의 탁월한 서예가로 당대는 물론, 후대의 서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승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법계를 거쳐 승려의 최고 지위인 왕사에까지 올랐다. 그는 왕희지체를 주로 따랐고 안진경의 서체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서체를 형성했다.

고려 시대 문인이자 문신인 이규보(1168~1241)는 당시까지의 서예가 중 김생·유신·탄연·최우를 '신품사현'으로 꼽고, 탄연의 글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의 '동국제현서결평론서(東國諸賢書訣評論序)'에 나오는 글이다.

'왕사 탄연의 글씨는 행서에 더욱 뛰어났다. 매번 들춰볼 적마다 정채가 찬란히 피어 마치 연꽃이 못에서 나온 듯하고, 가운데에 뼈와 가시를 머금고 고운 살로 가린 듯하다'라고 평한 뒤, 그의 솜씨는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환하기가 달이 구름 속에서 나오는 듯하고(皎如明月之撥雲)/ 빛나기는 연꽃이 못에서 피는 듯하다(粲若芙蓉之出池)/ 아리따운 여인마냥 약하다 하지마라(非謂脆弱兮如美婦人)/ 겉은 연미한 듯하나 속에는 단단한 힘줄 있네(外若姸媚兮中以筋持)/ 한 점 한 획 제자리에 있으니(一點一劃妥帖得宜)/ 사람 솜씨 아니라 신이 베푼 것이라네(非意所造神者乃施).'

밀양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9세에 이미 문장에 능하고 시를 잘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세인 1085년 고려시대 과거시험인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해 이름이 알려졌고, 숙종은 그의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초빙해 세자(예종)의 곁에서 글과 행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 먼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1088년 19세 때 궁중에서 몰래 나와 성거산(聖居山) 안적사로 출가했다. 이후 승려로 살면서 1104년에는 승과에 합격, 왕명에 따라 충청도 의림사 주지가 되었다. 여러 승려 직위를 거친 후 1145년에는 왕사에 책봉되었다.

그의 서풍은 12세기 고려 절정의 귀족적 세련미를 녹여낸 것으로, 400년 동안 풍미한 서풍을 대체하면서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주도했다.

탄연의 글씨 중 대표작은 1130년에 세워진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비(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碑)'다. 이 문수원중수기비는 고려시대의 진락공 이자현이 문수원(춘천 청평산)을 중수하여 불교를 연구하고 후진을 가르쳤는데, 그가 별세한 뒤 나라에서 그 삶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앞면은 김부식의 아우 김부철이 글을 짓고, 육순의 탄연이 특유의 행서로 글씨를 썼다. 서체는 왕희지체에 너무도 가까워서 왕희지의 집자비가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뒷면에 혜소가 지은 '제진락공문(祭眞樂公文)'이 있는데, 역시 탄연의 해서 글씨다.

이 금석문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조각으로 깨져 그 일부만 동국대박물관에 수습되어 있다.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1148)도 굳센 필획과 유려한 필치가 무리 없이 어우러져 신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이미 왕희지체의 틀을 벗어난 '탄연체'로 평가받는다. 안진경도 탄연의 서풍 형성에 영향을 주었는데, '운문사원응국사비'는 왕희지를 종주로 삼고 안진경을 본받아 왕희지체의 청경(淸勁)한 품격에 안진경체의 중량이 첨가된 서풍을 드러낸 것이다.

문수원중수기와 원응국사비의 서풍은 신라 이후 수용한 왕희지의 행서 서풍을 탄연의 미감으로 녹여내 정립한 것이다. 부드럽고 우아함이 뛰어난 왕희지 서풍에 비해 예리함과 굳셈까지 어우러져 이후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이른바 '탄연체'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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