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무기여 잘 있거라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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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13   |  발행일 2022-05-13 제15면   |  수정 2022-05-13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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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1961년 5월13일 미국 배우 게리 쿠퍼가 세상을 떠났다. 게리 쿠퍼는 84편이나 되는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그는 헤밍웨이 소설 원작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도 열연했다.

스페인 내전에 자원 참전한 미국인 조던은 교량 파괴 임무 수행 중 자신의 노고가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군의 작전이 바뀐 탓이다. 그럼에도 조던은 끝까지 다리 폭파에 매달리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제1차 세계대전 군의관 헨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영국 간호사 버클리와 만나 연인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은 스위스로 탈출하지만 버클리가 사산 후 본인도 사망한다. 두 소설에서 작자는 전쟁 미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다.

978년 5월13일 경순왕이 고려에서 죽었다. 그가 천년고도 경주에서 죽지 않은 것은 그 전에 이미 왕건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935년 9월 기록에 담겨 있는 신라 조정의 고려 투항 여부 논의 장면을 본다.

마의태자가 "스스로 곧게 지키다가 힘을 다해본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1천 년이나 내려온 나라를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한다. 이에 경순왕은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가 땅을 덮도록 하는 일(肝腦塗地)을 내가 차마 할 수는 없다"라고 대답한다.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 "마의태자가 없었으면 천 년 군자의 나라가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썼다. 왕건에게 '상부' 소리를 들으며 평생 호의호식한 아버지 경순왕에 견줄 때 마의태자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조선조 생육신처럼.

경순왕이 마의태자처럼 여생을 보냈다면 역사는 그의 진정성을 인정해주었을까? 그렇지 않다. 전쟁이 벌어져도 왕건은 신라의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지 않는다. 그 무렵 일반백성은 국가의 '재산'이었다. 경순왕은 백성을 핑계로 자신이 챙길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취했을 뿐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의 조던과 헨리는 전쟁 탓에 생명 또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그래서 문무왕은 긴 전쟁을 끝낸 다음 무장산 계곡에 무기를 묻으며 평화 시대의 도래를 선포했다.

전쟁 없이 마의태자는 금강산을 눈물로 적셨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와 또 다시 결혼한 경순왕 김부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을 노래했다. "임금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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