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9] 산곡도인 황정견…사공의 노가 허공 날다가 물결에 부딪혀 파문이 이는 것을 보고 '서법 이치' 깨닫기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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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03   |  발행일 2022-06-03 제34면   |  수정 2022-06-03 08:00
황정견-화기훈인첩
황정견이 짓고 쓴 시 '화기훈인(花氣薰人)'

황정견(1045~1105)은 중국 북송시대 서예가이다. 유명 문학가이기도 하다. 서예가로는 채양, 미불, 소식과 더불어 북송 4대가로 꼽힌다. 호는 산곡도인(山谷道人)이며, 흔히 '황산곡'으로 불린다.

1067년 진사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국사편수관으로 있을 때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많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유배를 당했다. 1101년 휘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기용되기는 했으나, 또다시 유배지를 전전하다 1105년 유배지에서 별세했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붙여 주었다.

지조를 지킨 그는 역경에 처해서도 가난과 고난을 기꺼이 즐기면서 태연하게 지냈다. 평생 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선학(禪學)의 영향도 비교적 깊게 받았다.

시를 잘 지은 그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조종(祖宗)으로 추대받았다. 두보를 특히 존경했다. 그는 과거의 문장이나 시구를 빌려 자신의 학문을 도야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거듭나야 하며, 시인은 기교의 속박을 벗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서쌍절(詩書雙絶)'이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해서·행서·초서 3체 모두에 능했다. 앞서간 서예가들의 글씨를 섭렵하고 장점을 취하며 소화한 뒤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자신의 예술적 소양과 결부시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도중에 사공이 힘들게 노를 저을 때마다, 노들이 번쩍번쩍 허공을 날다가 물결에 부딪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서법의 이치를 깨닫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만년에 접어들면서 그의 글씨는 완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풍격을 창출했다.

'내가 검남(黔南)에 있을 때는 나의 글씨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융주(戎州)로 옮겨온 후 옛날에 쓴 글씨를 보니 보기 싫은 글자가 대략 열 자 가운데 서너 자나 된다. 지금 비로소 옛사람들이 말한 침착통쾌하다는 말을 깨닫게 되었으나,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구나.'

그가 자신의 글씨와 관련해 남긴 소회 중 하나다.

그의 작품으로 '복파신사시권(伏波神祠詩卷)' '송풍각시(松風閣詩)' '이백억구유시권(李白憶舊遊詩卷)' '화엄소(華嚴疏)' '화기훈인첩(花氣薰人帖)' 등이 전하고 있다. 복파신사시권은 큰 글씨로 쓴 대작으로, 그가 병에서 회복 후 쓴 득의작(得意作)이다. 범성대(范成大)는 이 작품에 대해 '황산곡은 만년에 서법이 완성되었으나, 이 서첩에 대해서는 조금도 남은 여한이 없을 것이다. 손과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붓과 먹이 또한 사람의 뜻과 같다'라고 평했다.

'송풍각시'는 황정견이 직접 시를 짓고 행서로 쓴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화기훈인첩' 역시 그의 최상급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꽃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해 명상을 깨뜨리려 하네(花氣薰人欲破禪)/ 사실 마음은 이미 중년을 지났지만(心情其實過中年)/ 봄이 오면 시상을 떠올리는 것 무슨 까닭인가(春來詩想何所以)/ 여덟 굽이 강가에서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오르네(八節灘頭上水船).'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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