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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기자〈사회부〉 |
처음 본 광경이었다. 최근 어린이보호구역 취재 중에 좁은 골목길을 운전했다. 한 노년의 신사는 내 앞에서 느긋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차가 뒤따르자 그는 뒤를 한 번 쓱 돌아봤다. 그리고 마침내 왼손을 뻗어 좌회전의 뜻을 밝혔다. 자전거 앞에서 기다리던 횡단보도 앞 사람들도 수신호를 본 뒤 한 박자 빠르게 길을 건넜다. 나는 단 한 번도 대한민국에서 골목길 자전거가 '맨손 깜빡이'를 켠 것을 보지 못했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수많은 비상식적인 이륜차·자동차들의 신호 없는 도로 주행만 많이 봐왔다.
2018년 영국 생활 5개월 차, 자전거를 사서 출근길을 달렸다. 한 번은 속도를 가장 높인 와중에 앞에 보이는 차량·자전거 신호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급하게 정지했지만, 정지선을 넘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런던 시민들은 나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며 정지선 뒤로 가라고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떤 노인은 나를 발로 차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혹시나 인종 차별인가 했더니 보행자를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런던시민들은 누구나 상관없이 무자비했다. 나도 수차례 목격했음을 기억한다.
1년여간의 영국 생활 중 가장 그 나라가 부러웠던 것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웅장한 랜드마크가 아닌 그 나라의 '보행자 중심' 교통 문화였다. 런던 도심 내부에는 자전거 도로가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바퀴만 빼놓고 도망가는 자전거 도둑과 비양심적인 도로 주행만 아니면 영국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쉽고 안전하다. 하지만 영국에선 어떤 탈것도 보행자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가 본 유럽 국가 중 네덜란드는 보행자가 신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보호가 철저했다. 수m 밖에서 횡단보도로 걸어오는 보행자가 있으면 차량과 자전거는 몇 분이 되건 묵묵하게 횡단을 기다린다. 경적을 울렸다간 도리어 '육두문자'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민식이법' '도심 3050' '우회전 멈춤' 등 큼지막한 교통 관련 이슈가 대두되고 법 개정이 이뤄졌다. 이 법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통 불편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다시 속도를 올려야 한다는 시민도, 개정법을 이해하지 못해 단속 경찰에게 따져 묻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시간은 '금(金)'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불편을 빌미로 진보하지 못한다면, 아직까지도 교통약자인 우리나라의 보행자들은 신호 없는 횡단보도에서 하염없이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이동현기자〈사회부〉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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