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3·8만세운동 역사 재정립 필요" 대구YMCA서 학술회의 열려

  • 박영민
  • |
  • 입력 2023-12-07 19:25  |  수정 2023-12-07 19:40  |  발행일 2023-12-08
정태식 경북대 연구원 "이만집 목사, 대구YMCA가 3·8운동 역사에서 사라져…"
대구 3·8만세운동 역사 재정립 필요 대구YMCA서 학술회의 열려
7일 오후 3시 대구보훈청·대구YMCA 주관으로 열린 '대구 3·8운동과 동아시아의 대안적 출구' 학술회의에서 이국운 한동대 교수(왼쪽)과 정태식 경북대 연구원이 강연을 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일어난 '3·8 만세운동'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7일 오후 대구YMCA에서 열린 '대구 3·8운동과 동아시아의 대안적 출구' 학술회의에서 정태식 경북대 박사는 "대구시 홈페이지에는 3·8만세 운동을 소개하며 '박상진·윤상태·서상일 등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명시돼 있다. 이 중 서상일은 '친일'을 한 사람"이라며 "정작 3·8만세 운동을 이끈 이만집 목사, 교남YMCA(현 대구YMCA)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를 재정립 해야한다"고 밝혔다.

정 박사에 따르면, 대구 3·8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3일 독립선언 발기인 33명 중 1명이 당시 계성학교의 교장이자 교남YMCA 회장인 이만집 목사에게 시위 동참을 부탁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이 목사는 대구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해 만세 운동 일자를 서문시장 장날이기도 한 3월 8일로 정했다.

3·8 만세운동 당시 서문시장 주변에만 8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기관총·소총 등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이 시위를 진압했고, 참가자 157명이 구속됐다. 3·8 만세운동은 경상도 지역의 첫 독립 만세 운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후 이 목사가 3년 간 옥고를 치르면서 3·8 만세운동 역사에서 이 목사와 교남YMCA 등이 흔적에서 지워졌다는 게 정 박사의 주장이다. 정 박사는 "(이 목사가) 옥고를 치른 뒤 일제와 원만한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던 선교사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후 이 목사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교회 자치를 선언하면서 교계에서 제명이 됐다"며 "이 목사가 창립한 대구YMCA도 이후 3·8 만세운동의 주역에서 지워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정 박사는 "이 목사의 3·8 만세운동은 결국 실패했지만, 덕분에 당시의 기독교 지식인들이 민족문제에 깊이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 대구 3·8 만세운동 주체인 이 목사, 교남YMCA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대구지방보훈청과 대구YMCA가 주최한 이번 학술회의는 대구 3·8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교남YMCA와 3·8운동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그 의미 등을 살펴보기 위해 마련됐다.

글·사진=박영민기자 ympark@yeongnam.com

기자 이미지

박영민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