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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열 영남이공대 교수 겸 한국보훈포럼회장 |
경북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로 보훈학적 관점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의성의 독립운동가 중 대표적인 인물로 이만준 선생을 꼽을 수 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의하면 이만준 선생은 1888년 1월16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15일부터 19일까지 지속 된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를 마친 김옥돈(金玉頓) 등과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만세운동을 거행하자고 제의하였다. 참석자들은 이에 적극 찬동한 후 거사 준비를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계획을 알리고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시위 도중 합세한 250여 명의 주민을 주도하여 안평면(安平面) 마전동(馬轉洞)을 거쳐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3월18일 밤에는 전날의 150여 명보다 더 많은 300여 명의 군중이 대사동 우리곡에 운집하였다. 전날 이루어진 만세시위 참가자 체포에 격분한 시위대는 안평 주재소를 습격하는 적극적인 투쟁 국면에 돌입하였다. 이만준 선생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전날과 같이 안평면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朴谷洞)·괴산동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19일에는 도리원(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 군중을 결집한 후, 의성 경찰서를 공격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탈환하려는 적극적인 항쟁계획을 세웠다. 이만준 선생은 400여 명의 시위대를 직접 지휘하였는데 안평주재소를 향하는 과정에서 300여 명이 합세하였다. 이후 안평면 박곡동·석탑동(石塔洞)·신월동(新月洞)을 거쳐 거사 장소인 도리원 장터로 행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시위집단은 수천 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건물 포위 후 투석을 통해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무차별 총격으로 응수하여 권해운(權海雲)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10여 명이 총상을 당했다. 결국 강제 해산된 시위대 중 시위 주도 인물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이때 붙잡혔다. 이후 1919년 5월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특히, 이만준 선생의 부친 이원춘 선생, 사촌동생 이맹준 선생 역시 3·1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훌륭한 독립영웅 집안이다.
이만준 선생의 빛나는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보훈문화 확산을 위해 몇 가지 정책 제언을 제시하면 첫째, 이만준 선생 및 가족의 출판작업이 필요하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로 이만준 선생 외 이원춘, 이맹준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고 이 자료를 근거로 시민·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둘째, 터만 남아있는 이만준 선생의 생가 복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의성군은 경북도와 협의해 지방비를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국가보훈부에 국비 신청을 하는 머치펀딩 형태로 늦어도 2028년엔 생가복원 설계비 관련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이 필요하다. 1차적으로 2026년도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 선정, 2차적으로 2027년 국가보훈부에 신청하여 선정받도록 한다. 넷째,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잊힌 영웅,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학술 포럼을 개최해 애국심 및 독립유공자에 대한 존경심을 배양하도록 한다.
김태열 영남이공대 교수 겸 한국보훈포럼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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