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신림동’ 팔공산 도장·서당마을 고시촌을 아시나요

  • 박진관
  • |
  • 입력 2012-11-09   |  발행일 2012-11-09 제35면   |  수정 2012-11-09
‘대구의 신림동’ 팔공산 도장·서당마을 고시촌을 아시나요
대구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도장마을(왼쪽)과 서당마을. 이 마을 출신 고시합격자가 수두룩하다.

고시에 합격하면 온 마을이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고시합격자의 모교와 출신 마을엔 합격축하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이제 20세기의 추억으로 넘어갈 듯하다.

대구지역에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 신림동 못지않은 유명한 고시촌이 팔공산 자락에 있었다.


1950∼90년대 중반 고시생 상대로 하숙 쳐

한때 마을당 200명 한 집서 20∼30인분
식사 준비한 적도

“시설 좋고 정보 많은 서울로 다 가버려
이젠 한 명도 없지요”

그때 밥맛 못 잊어 한번씩 찾아 오기도


◆대구 고시촌 원조 도장마을

“80년대 초에는 30명까지 하숙을 친 기억도 있습니다.”

대구시 동구 도학동 도장마을에 사는 박정자씨(71)의 말이다. 박씨는 20여년간 고시생을 상대로 하숙을 쳤다.

도장마을은 대구에서 한때 고시촌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동구 백안삼거리에서 동화사 방향으로 1.5㎞쯤 가다 공산119안전센터 부근 삼거리에서 다시 북지장사 쪽 방짜유기박물관을 지나면 오른편에 ‘범죄 없는 마을’이란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오붓한 마을이 나온다. 첫눈에 봐도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라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란 느낌이 든다.

도장마을 주민은 주로 사과, 포도 등 과수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 통장 권정숙씨는 “우리 마을에선 1950년대부터 고시생을 상대로 하숙을 쳤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바로 밑에 서당마을이 생기기 전에도 하숙을 쳤지요. 지금 2가구의 집주인은 다 돌아가시고 1집만 남았어요. 새누리당 국회의원인 주호영씨가 여기서 공부한 걸로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도장마을에서 고시생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

“시설이 편하고 정보를 얻기 좋은 데를 찾다보니 그렇게 됐지요. 지금은 서울로 다 가버렸지, 아마.” 박정자씨의 말이다.

박씨는 한꺼번에 20~30인분의 밥을 했던 기억이 있다. 연탄보일러로 난방을 했고 여름에는 선풍기가 없어도 시원했다.

“고기만 빼고 쌀, 채소, 과일은 모두 자급자족했습니다. 고시생들이 밥맛이 좋다고 늘 칭찬을 했지요. 하숙을 친 돈으로 자식공부 다 시켰습니다. 지금 큰딸은 법원에 근무하고 아들은 교사를 하고 있지요.”

박씨는 “여기서 공부해 출세한 사람들이 한 번씩 찾아와 ‘그때 먹었던 밥맛이 그립다’고 인사를 하는데 하숙생을 하도 많이 쳐서 누가누군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웃으며 회상했다.

◆서당마을

“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의 하나로 22가구의 양옥주택단지를 조성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구당 330㎡(100평) 정도의 신식주택이 쭉 늘어서 있어 장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지요.”

대구시 동구 도학동 서당마을에 사는 나이흠씨(80)의 추억이다. 서당마을은 공산119안전센터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 역시 90년대 중반까지 고시촌으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마을 옆에는 동화천이 흐르고 있어 진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건’이 종종 벌어졌다.

“집집마다 적게는 3~4명, 많게는 10명 넘게 고시생이 있었어요. 84~85년에는 200명도 넘었을 겁니다. 마을 주민보다 고시생이 더 많았으니까요. 보통 1년에 3~4명은 고시에 합격해 이곳에서 공부하면 무조건 합격한다는 소문이 고시생 사이에 자자했지요.”

나씨는 고시생이 북적거렸던 이유에 대해 “전부 새 집인 데다 동화사로 가는 도로가 지금처럼 확·포장되지 않아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등 조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씨는 “이명규 전 국회의원도 우리 마을에서 5년간 공부했던 걸로 알고 있다”면서 “옛날 우리 마을 뒤에 조선시대 서당터가 발견돼 서당마을로 부르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도 주택 1층 마당과 옥상에는 고시생들이 묵었던 가건물 흔적이 남아있다.

나씨에 따르면 옛날에는 구멍가게도 2군데나 있었고, 저녁나절이면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자욱했다고 한다. 고시를 치는 날에는 단체로 택시를 대절해 고사장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도로가 확장되고 건물이 낡아지면서 고시생들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 지금은 한명도 없다.

대구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도장마을(왼쪽)과 서당마을. 이 마을 출신 고시합격자가 수두룩하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