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1]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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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1-08   |  발행일 2014-01-08 제20면   |  수정 2014-01-08
부모 늙어감이 하루하루 아까운 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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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이현보가 연로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애일당. ‘애일(愛日)’은 노부모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끼며 효도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중기 때 문신이며 문학작품으로도 유명한 농암(聾巖) 이현보(1467~1555). ‘어부가(漁夫歌)’ ‘효빈가(效嚬歌)’ ‘농암가’ 등을 남긴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 사상 강호시조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낙동강변에 가면 그의 다양한 유적을 만날 수 있다. 근래 그의 후손이 터를 잡아 곳곳에 있던 것을 이전하고 복원한 유적들이다. 농암종택을 비롯해 그를 기리는 분강서원, 애일당, 농암신도비, ‘농암’ 각자바위 등이 몰려있다. 농암은 각별한 효행으로도 유명한데, 그 효행의 정신이 담긴 유적이 바로 ‘애일당(愛日堂)’이다.


어버이 봉양 위해 외직 요청
즐겁게 해드릴 장소가 없어
바위 위에 집 지어…
명절마다 때때옷 입고 효행


◆ 70대 노인이 부모 앞에서 때때옷 입고 춤추며 효도하던 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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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일당’ 편액. 중국 명필을 찾아가 받아온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애일당은 농암이 1512년 연로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애일’은 늙은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므로 하루하루를 아끼며 효도를 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부모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愛日堂)이라 한 것이다. 애일당을 짓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농암의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1548)에 잘 나와있다.

“애일당은 집 동쪽 영지산(靈芝山) 기슭의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1508년 가을, 내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을 요청해 겨우 영천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영천은 고향과 3일 걸리는 거리인데, 늘상 공무로 바쁘면서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은 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유감스러운 것은 고향 처소가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릴 만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1512년, 마침내 바위 위에 집을 지었다.

바위에 이름이 없었고, 민간에서는 ‘귀먹바위(耳塞巖)’라 한다. 그 앞에 큰 강이 있고 위쪽에 급한 여울이 있는데, 여울의 물소리가 대단해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버린다. ‘이색’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은둔해 세상 소식을 듣지 않는 사람의 거처로는 참으로 적당한 곳이라서 이 바위를 ‘농암’이라 하고 늙은이의 호로 삼았다.

명절마다 반드시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때때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드리기를 이 집에서 했다. 그러나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한편으로 기쁘면서 한편으로 슬픈 마음(喜懼之情)이 들지 않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愛日)’이라 했다.”

애일당을 중수하고 이 기문을 지을 당시에는 농암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래서 어떤 이가 당을 중수해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손에게 놀고 즐기는데 빠지게 할 우려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농암은 “당의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은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고, 어버이를 봉양할 날이 부족하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늙은이의 자손 역시 이 마루에 올라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어버이를 가까이하면서 오직 효성만을 본받도록 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가가 있으면 조용히 가슴을 열고 수양하는 장소로 삼고자 함이다. 그러면 애일당이 우리 가문에 대대로 지켜져야 하는 규범이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자손에게 누가 될 것인가라고 답했다. 애일당중신기에 있는 내용이다.

농암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은 이미 이때 70세가 넘은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한다. 이후 선조 임금이 농암가문에 ‘적선(積善)’이라는 대자(大字) 글씨를 하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일당구로회는 이후 농암종택이 400여년을 이어오는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애일당은 농암의 나이 46세 때 안동 도산면 분강(汾江) 기슭 농암(聾巖) 위에다 처음 지었으나, 세월이 흘러 당이 무너지자 1548년 농암의 아들이 개축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애일당은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이건되었다가, 현재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올미재) 농암종택으로 자리로 옮겼다.


◆ ‘중국 제2명필’이 썼다는 편액 글씨

‘애일당’ 편액 글씨와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농암은 제자를 중국에 보내 중국 명필의 글씨를 받아오게 했다. 제자는 수개월 만에 중국에 도착했고, 다시 그 명필을 찾아 한 달을 헤맸다.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수소문해 찾아 ‘애일당’ 글씨를 청했다. 그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듬뿍 먹을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자를 써서 내주었다. 하지만 농암 제자는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좋은 붓으로 정성스레 글씨를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써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제서야 제자는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끝내 써주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면 자신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제자는 할 수 없이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분은 저의 스승으로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에서 왔다하여 써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는 스승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학 한 마리 정도는 날려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글씨를 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돌아온 제자는 농암을 볼 낯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주다가 그가 세상을 뜨면서 고백해 알려졌다고 한다.

힘있는 해서체인 ‘애일당’ 편액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농암이라 불리는 절벽 위에 세워진 애일당은 안동댐 건설로 1975년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졌다가, 2005년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건됐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 명필 신잠의 글씨 편액 ‘긍구당’

농암의 고조부가 처음 지어…“조상의 유업 길이 이어가자”의미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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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구당’ 편액. 글씨는 조선 전기 명필 신잠이 썼다. 농암종택 별당인 긍구당은 농암이 태어나고 별세한 건물로,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간다’는 의미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농암종택의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은 농암의 고조부가 고려말 처음 지었고, 농암이 중수한 뒤 ‘긍구당’이란 편액을 단 건물이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遺業)을 길이 이어간다’는 의미다. 농암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별세했다.

전서로 된 편액 글씨는 당대 명필인 영천자(靈川子) 신잠(1491~1554)이 썼다. 신잠은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능해 ‘3절(三絶)’로 불리던 인물로, 특히 묵죽과 포도 그림에 뛰어났다. 1519년 과거 급제 후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그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었다. 그 후 20여년간 양주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말년에 상주목사로 선정을 베풀다 사망했다.

‘긍구당’ 편액 원본도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돼 있고, 건물에는 복제본이 걸려있다.

1551년 7월29일 85회 생일을 맞이한 농암은 긍구당에서 자제들과 사돈인 탁청정 김유, 족질인 퇴계 이황, 손서인 김계 황준량 등으로부터 잔치상을 받고 그 회포를 국문시조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했다. ‘공명이 끝이 있을까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 금서띠(金犀帶) 굽은 허리 여든 넘어 봄 맞음 그 몇 해이던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의 은혜일세.’

농암은 은퇴 이후 주로 긍구당에서 생활했다.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그림과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는 화초와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 같았다고 한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농암의 모든 유적이 사방으로 분산되었는데, 도산면 분천리에 있던 긍구당은 도산면 운곡리 분강서원 앞에 이건되었다. 그러다 2003년 도산면 가송리(올미재)에 농암종택의 정침과 사랑채가 복원될 때,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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