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 & 樂] 제3부 대구의 새로운 지도 (2) 근대골목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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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03   |  발행일 2014-06-03 제11면   |  수정 2014-06-03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사연 근대路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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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청라언덕에서 계산성당으로 이어지는 3·1운동길. 90개의 계단을 따라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지나 다녔다고 한다. <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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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이 열렸고, 김대건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천재화가 이인성의 작품 배경이 되었고, 시인 이상화가 영감을 받아 ‘나의 침실로’를 지었다는 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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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니스주택은 드라마 ‘각시탈’‘사랑비’ 등에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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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 옆 이상화 고택은 항일 문학가 이상화 시인이 작고한 1943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2007년 도심 재개발로 허물어질 뻔했지만 시민들의 보존운동으로 철거를 면했다. <중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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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투어에 나선 시민들이 작곡가 박태준의 짝사랑이 시작된 청라언덕을 둘러보고 있다.


90개의 계단을 오른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만세운동 집결지로 향하던

피끓는 분노와, 이국땅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이역만리를 마다않은

뜨거운 열정과, 백합 같은 그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애틋한 사랑이 오롯이 전해지는 길이다. 천천히 과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길을 걷다 보면,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은 100년 뒤 어떤 이야기로 전해질까

문득 궁금해진다.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천개의 골목, 1천개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근대 골목이 소중한 까닭이다.


◆골목에 100년의 이야기가 있다

100년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는 근대골목은 대구 읍성 주변 골목의 이야기를 발굴해 5개의 코스로 엮어낸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시작은 2001년 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가 좁은 골목길의 숨은 역사를 끄집어 낸 ‘대구문화지도 만들기’였다. 권 이사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2002년 ‘거리문화시민연대’라는 시민단체도 만들었다. 이들은 골목을 찾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100명의 조사원이 골목을 다니며 골목길에 숨은 역사를 끄집어냈다. 그 성과가 대구 근대사 가이드북 ‘대구新택리지’다. 이 책은 대구 전통 공간과 근대 건축물, 역사 거리 등을 총망라한 ‘생활사 지도’다. 뜻을 같이한 시민운동가들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골목해설사를 길러냈고, 문화자산으로서의 골목을 세상에 알리는 일도 했다.

행정기관도 근대골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7년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생가가 아파트 건설로 철거될 상황에 이르렀을 때였다. 상화 고택과 함께 인접한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인 서상돈 고택 보존이 시민운동으로 확대되었고, 대구시와 중구청은 2007년 근대골목 디자인 개선 사업을 시작으로 2009년 종로·진골목 개선 사업 등 행정적 지원에 나섰다.

골목이 이야기와 함께 살아나면서 사람들이 돌아왔다. 한 해 20만명의 관광객이 몰리면서 근대골목투어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렸던 2013 아시아 도시 경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5개 코스, 골라 걷는 재미가 있다

모두 5개의 코스가 있지만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2코스다. 출발점은 동무생각 작곡가 박태준의 짝사랑이 시작된 곳, 청라언덕이다. ‘대구의 몽마르트’라 불리는 청라언덕에는 19세기 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왔던 선교사들이 살던 서양식 주택 세 채가 담쟁이덩굴에 덮인 채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에서 살았던 선교사들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스윗즈주택, 챔니스주택, 블레어주택이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은혜의 정원’이라는 작은 선교사 가족 묘지도 있다.

청라언덕을 지나 계산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학생들이 일본경찰을 피해 모여들었던 길이다. 90개의 계단 끝은 보도블록이다. 이 역시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블록마다 묘하게 연대가 찍혀 있다. 반대쪽엔 그해의 대구 대소사가 음각으로 기록돼 있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그날처럼 태극기도 펄럭인다.

계단을 내려오면 골목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이 열렸고, 김대건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천재화가 이인성의 작품 배경이 되었으며, 시인 이상화가 영감을 받아 ‘나의 침실로’를 지었다는 계산성당으로 이어진다.

계산성당 옆 이상화 고택은 항일 문학가 이상화 시인이 작고했던 1943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상화는 1939년부터 194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단층 목조건물에서 살았다. 2007년 도심 재개발로 허물어질 뻔했지만, 시민들의 보존운동으로 철거를 면했다.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빼앗긴 국권 회복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 선생의 고택도 바로 옆이다.

골목의 마지막은 약전골목과 진골목이다. 백미는 소설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인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된 장관동과 종로, 진골목 일대다. 영생덕 만두전문집, 양곡배급소였던 C&S 편의점, 대구화교소학교, 정소아과 의원 등 소설 속의 무대들과 만나는 색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진골목은 대구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옛 대남한의원 네거리를 통과해 종로 쪽으로 50m 정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질~게’ 뻗어있다.

도심재생사업의 성공적인 모델은 대구의 역사가 시작된 경상감영과 일제강점기 시대상을 보여주는 북성로를 돌아보는 1코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를 되짚어가는 1, 2코스와 달리, 지금의 대구를 느끼고 싶다면 3, 4코스를 권한다. 3코스는 주얼리타운과 교동 귀금속거리, 동성로, 서문시장 등을 돌아보는 코스이며, 4코스는 봉산문화거리에서 사랑했지만 먼지가 되어버린 가수 김광석 골목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5코스는 천주교 신자들의 성지순례 코스로 알려진 남산 100년 향수길이다. 관덕정 순교기념관과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모당,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등 천주교 사적지들이 몰려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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