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 하다 .18] 김천이 배출한 조선의 대표 청백리 老村 이약동

  • 이지용
  • |
  • 입력 2014-09-04   |  발행일 2014-09-04 제11면   |  수정 2014-11-21
“채찍도 公物” 말머리를 돌리고, 뇌물 갑옷을 바다에 던지다”
20140904
김천시 양천동의 하로서원은 노촌 이약동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노촌은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뽑혔으며 ‘청렴’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로 뽑혀

육당 최남선은 1914년 창간된 월간종합잡지 ‘청춘’에 ‘조선 500년 대표인물 100인’을 실었다. 덕목, 절개, 효행, 열녀 등 100가지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선정했는데, ‘청렴’분야에서는 노촌 이약동(老村 李約東·1416~93)이 뽑혔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최대가치로 여긴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최고의 청백리로 인정받은 이약동은 김천 하로촌(현재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1950년에 발행된 김천향토지는 김천에서 제일 이름난 마을을 하로촌으로 꼽고 있다. 이 마을에서 이약동을 비롯한 삼판서(三判書)와 육좌랑(六佐郞)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좌랑은 벼슬이 그리 높지 않은 정6품 관직이지만 상급자인 정5품 정랑(正郞)과 한 조가 되어 행정실무를 총괄했는데, 육조의 권한이 강화되고 국정의 중심기구가 된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청요직(淸要職)이었다.

하로마을 입구에 있는 사모바위 전설을 들어보면 조선초기에 이 마을에서 ‘귀찮을 정도로’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목사때 관리 부정부패 끊고
민초 세금 줄이는 선정으로 칭송
일찍부터 교류 깊었던 김종직
“모든 사람의 참된 우두머리” 추앙


원래 이 바위는 하로마을 뒤 고성산의 절벽끝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초기 당시 이 바위가 영험해서 많은 과거급제자가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행차와 고관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김천역의 역졸들은 그 뒷바라지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한 역졸이 사모바위가 없으면 마을의 번성도 사라질 것이고 편히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사모바위를 산 아래도 굴려뜨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조선후기로 가면서 이 마을에서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로마을 사람들은 산 밑에 떨어진 사모바위를 마을입구로 옮겨놓고 매년 정월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마을은 벽진이씨와 화순최씨, 성산이씨의 집성촌으로 현재 60여호가 모여 산다.


◆ 유림에서 추앙받던 명문집안의 자손

이약동의 부모는 마을과 20여리 떨어져 있는 금오산 정상 약사암에서 10년간 불공을 드려 그를 낳았다. 약동이라는 이름도 약사암에서 불공드려 낳은 아들이라 해서 지었다. 본관은 성주 벽진이고 자(字)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이었다. 할아버지 이존실(李存實)은 군기시소감을 지냈고, 아버지는 남해현령을 역임한 이덕손(李德孫)이다. 어머니는 공조판서를 지낸 유무(柳務)의 딸이다.

세종 23년(1441)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종 1년(1451) 정과(丁科)에 급제한 뒤 사섬시 직장(直長)을 거쳐 단종 2년(1454)에 감찰·황간현감 등을 역임했다. 세조 4년(1458) 조정의 추천으로 유장(儒將)이 되었으나 임기가 끝나지도 않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청도군수가 되었고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했다. 66년 종부시 정(正)이 되고 구성절제사 등을 역임하다가 68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약동은 일찍부터 ‘영남 사림파의 영수’로 추앙을 받고 있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도 교유가 깊었다. 그의 고향이 점필재가 벼슬살이를 하였던 선산(善山)과 가까웠을 뿐 아니라, 점필재가 한때 김천에서 경렴당(景濂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약동이 김종직보다 나이가 15세나 위였기 때문에 김종직이 언제나 이약동을 따르고 존경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김종직이 그에게 보낸 시에는 그를 칭송하는 글귀들, 예를 들어 ‘백관 중에서도 가장 고루 덕이 뛰어나다’든가 ‘공은 시서(詩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참된 우두머리’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이러한 김종직의 시를 분석해 보더라도 당시 노촌이 얼마나 유림 사이에서 추앙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김천 하로의 고향집에 내려와 살던 이약동이 후손들에게 유훈으로 남긴 시다.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 줄 것은 없고/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일세/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평생을 청렴하고 결백하게 살아오면서 재물을 멀리한 그의 신조를 여실히 알 수 있는 시다. 만년에는 김천의 고향집에 내려와 여생을 보냈는데,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만하였고, 아침 저녁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하였다고 전해진다.


◆ 제주에서 더 유명한 청백리

이약동에 대한 스토리는 제주에서 유독 많이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3년상을 치르고 1470년(성종1) 제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재직 중에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시키고,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선정을 펼쳐 칭송을 받았다.

지금도 한라산 곰솔공원에는 이약동의 산천단 이설과 관련된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사적비 내용을 보면, 제주 관아에서 한라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천단은 원래 한라산 정상 부근에 있었다. 그래서 제사 때가 되면 많은 관리와 군인이 동원되어 며칠씩 산에서 야영을 하며 행사를 치렀다. 혹한기에는 얼어죽는 사람도 있었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 보고하여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의 현재 위치로 옮기게 하였다. 이후에는 산신제 때문에 고통을 겪는 백성이 없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에는 이약동과 관련한 괘편암(掛鞭岩)·투갑연(投甲淵) 얘기도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로에 살던 평정공 이약동이 제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의 이야기다. 공은 재임 기간에 쓰던 관물인 관복이나 물건들을 정리하여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그런데 말을 타고 나루터까지 오다가 문득 손에 든 말채찍이 제주도의 관물임을 깨닫고 되돌아가 그것을 성문 누각(관덕정)에 걸어놓고 도성으로 갔다. 후임자들이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겨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 놓아 기념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게 되자 백성들이 바위에 그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기념하였는데, 그 바위를 괘편암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약동이 수행원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바다 중간쯤에 이르러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크게 일어 배가 곧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탄 일행이 어쩔 줄 모르는데 공은 태연하게 “우리 일행 중에 혹시 섬의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만약 섬 물건을 가져오다가 여기서 불행한 일이라도 생기면 뒷날 섬사람들이 탐관(貪官)이라고 죽은 뒤에도 욕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비장이 아뢰기를 “섬에서 떠나올 때 섬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주면서 바다를 건넌 후에 사또께 올려 그들의 정성을 표해 달라고 하기에 숨겨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그 갑옷을 바다에 던져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바다에 던지자 파도가 그치게 되었다. 그 갑옷 던진 곳을 투갑연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청렴을 기리기 위해 제주도민은 ‘생사당’을 지었는데, 산 사람을 위해서 사당을 짓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 때 상자와 농속에 새로 만든 그릇이 없고 구슬과 비단 등 토산물이 없다면 맑은 선비의 행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이약동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 어머니의 변을 맛볼 정도의 효자

20140904
하로서원 내 청백사에는 노촌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향사를 올린다.

이약동은 효성도 지극했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1459년부터 청도군수로 재임하던 중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약동은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 간병에 나섰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간병하면서 직접 어머니의 변을 맛보고 어머니와 고통을 같이 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손가락을 기름에 담가 태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의 보살핌을 뒤로하고 어머니는 그가 간병을 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약동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차리고 3년상을 치렀다.

20140904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 입구의 산천단유적비는 2009년 제주도민 정두정, 홍순녕, 김진수 등이 이약동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제주도에서 옮겨온 돌로 조성했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를 마친 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대사헌,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그후 성종 24년(1493) 하로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성종은 크게 애석하게 생각하고 하루동안 조회를 폐하였다고 한다.

그는 뒤에 평정공(平靖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중종 9년(1514)에는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천거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사후 김천의 유림들이 그 덕을 추모하기 위해 김천시 감천면 원동마을에 청백사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후에 사당은 김천시 성내동 자산 기슭으로 옮겨졌으며 경렴서원(景濂書院)이라 불렸다. 경렴서원에는 이약동과 함께 이 지역 선현인 김종직과 최선문(崔善門), 조위(曺偉), 김시창(金始昌), 조유(趙逾) 등이 함께 배향됐다. 경렴서원은 대원군 때 철폐됐다가 후에 재건돼 하로서원으로 남아있다.

현재 이약동 선생만을 모시는 하로서원에서는 매년 봄, 가을 김천지역 기관장과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저서에는 ‘노촌실기(老村實記)’가 있고, 묘소는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묵방골에 있다.

글=심충택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김천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