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년의 비상! 경북도청 이전 풀 스토리 .9] 정신적인 가치를 지켜온 새 도읍지

  • 심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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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22   |  발행일 2014-10-22 제11면   |  수정 2014-10-22
선비와 착한 백성의 고을, 그 역사가 살아 숨쉰다
안동, 의리 밝히고 도학 중시
외딴마을서도 글 읽는 소리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 위치
예천은 복된지역으로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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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 전경. 조선 중기 몇 차례 일어난 사화(士禍) 정국 이후 퇴계 이황은 이곳에 머물면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등 쟁쟁한 인물을 길러냄으로써 이후 안동을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게 했다. <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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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과 일반 백성이 등장하는 하회탈놀이의 한 장면. 하회탈놀이에서는 기층민들이 양반과 선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해도 양반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장면이 재미있게 연출되고 있다. <영남일보 DB>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안동에 대해 ‘의리를 밝히고 도학(道學)을 중히 여기며 비록 외딴마을 쇠잔한 동리라도 문득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며, 떨어진 옷을 입고서 깨진 항아리로 굴뚝을 만든 집에 살더라도 도덕과 성명(性命)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예천에 대해서는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에 위치한 복된 지역’이라고 했다. 십승지로 지목된 안동·예천 모두 예전부터 ‘선비와 착한 백성이 살던 고을’이었던 것이다.

안동문화원(원장 이재춘)이 2009년 스토리텔러를 양성하기 위해 펴낸 ‘안동의 문화유산과 그 공간적 의의’라는 교재를 보면 안동시 임실면 박실마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임하댐 건설과 함께 지금은 수몰된 이 마을은 40여호 되는 산골동네였다. 그런데 이 마을에 문과 급제자가 10명, 생원진사 합격자가 34명이나 배출되었다. 더욱이 이 마을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자청해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던 인재라고 평가해서 연 삼대(三代)에 걸쳐 경상관찰사가 조정에 추천한 인물을 낳았다는 것’이라는 기록에 있다. 노애 류도원, 호곡 류범휴, 수정재 류정문으로 이어지는 삼대를 말한다.

여기서 박실마을을 사례로 들었지만, 안동과 예천은 고려 초기부터 역사의 중심에 서 오면서 인재의 보고 역할을 했다. 다산 정약용도 ‘영남인물고(嶺南人物攷)’에서 ‘영남은 향교나 서원을 가숙(家塾·집안공부방)으로 알고 스승과 벗을 친척으로 여겨 떼를 지어 놀고 무리 지어 익힘으로써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 당시 안동에는 서원이 62개소, 정자가 356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전국 시·군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예천의 경우도 두 개의 향교가 있었으며 정자와 누각은 110여개에 이른다. 서원과 고택은 너무 많아 세기가 벅차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당시 서원과 정자는 개인서당 또는 심성수양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중심으로 많은 저술과 후진양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촌인 의성김씨 내앞마을에 있는 정자만 하더라도 선유정(仙遊亭), 백운정(白雲亭), 송정(松亭) 등 28개소에 이른다. 이 가문에서는 100여명의 대소과(大小科) 합격자를 배출했고, 수많은 문집과 저술을 남겼다.



#1. 퇴계, 도산서당에 머물면서 쟁쟁한 제자들 육성

역사적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안동·예천지역은 조선시대와 우리 근대사를 거치면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안동은 특히 조선 중기부터 사림(士林)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박원재 수석연구원은 “조선중기 몇 차례 일어난 사화(士禍) 정국 이후 신진유학자들은 새로운 대안적 실천을 모색한다. 그것은 조급증을 버리고 승부를 멀고 길게 보는 것이었다. 그 결과 조정이 아니라 향촌의 유교화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향촌부터 성리학적 가치가 삼투되도록 함으로써 궁극에는 조선 전체를 도학의 정신이 구현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 연구원은 이러한 구상의 결과로 채택된 실천전략이 곧 ‘서원운동’과 ‘향약운동’이라고 분석했다. 이 운동의 가장 중심에 선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에 머물면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등 쟁쟁한 인물들을 길러냄으로써 이후 안동을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함)으로 불리게 했다.

안동지역 향토사학가인 권오신씨는 “조선시대 때 안동은 유교이념에 따라 많은 집성촌이 형성되어, 집성촌을 중심으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다량의 저술작업도 이루어졌다. 성리학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예학도 발달하여 유교의례가 정교하게 행해졌다. 안동에 종가, 서원, 재실, 정자가 많은 것은 성리학적 가치를 실현할 유교문화가 융성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권씨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안동에는 과거시험 합격자가 서울 다음으로 많았다. 이들은 안동을 양반사회로 만들면서도 기층민들을 부드럽게 다스려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회탈놀이에서 기층민들이 양반과 선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해도 양반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2. 의리정신과 대의명분이 주민들의 가치관

퇴계학맥을 계승한 인물들이 강한 의리정신과 대의명분을 가지고 향촌사회를 유지하면서 안동·예천 일대는 민족수난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 북부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된 곳이다. 안동문화원이 펴낸 ‘송간(松澗)일기’ 해제본을 보면 국가적 환란 속에서 백성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송간일기는 송간 이정회(李庭檜·1542~1612)가 1577년(선조 10)부터 1612년(광해군 4)까지 35년간에 걸쳐 쓴 친필일기다. 모두 4권이다. 송간일기는 개인의 일기이지만 당대사회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특히 송간이 횡성현감으로 있을 당시인 1592년 8월26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의 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전쟁 초기에 들려오는 패전소식에 개의치 않고 군사를 정비하고 군기(軍器)를 손질하는 등 고을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매복전과 달아나는 적의 후미를 공격할 것을 지시하며, 백성의 고난에 대해 비통해하는 송간의 모습은 임진왜란사에서 안동출신 수령의 공로를 조명해야 할 부분이다.

송간은 1592년 8월9일 안동으로 돌아가는 아우 낙금헌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시킨다. 그리고 1593년 1월22일에는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를 묻고, 명나라 군대의 승전소식을 전한다.



#3.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의 본산

권오신씨는 “1894년 갑오변란에 대응하여 첫 의병항쟁도 안동에서 일어났는데 이를 갑오의병이라고 부른다. 이 항쟁에는 안동의 유력한 가문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1910년 나라를 잃게 되면서 이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이 순절(殉節)로 나타났는데, 당시 순절자는 전국적으로 60~70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런데 안동지역과 관계된 인물이 이만도를 비롯해 10여명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안동은 독립지도자와 항일투사도 다수 배출했다. 초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과 교육운동가 동산 류인식, 만주의 맹호인 일송 김동삼,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 하구 김시현, 의열단원 추강 김지섭, 임정 노동위원장 단주 류림, 저항시인 이육사, 제1차 조선공산당 집행위원장 김재봉,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이들은 만주로 망명하지 않아도 기득권을 누리며 잘살 수 있는 상층부 인사다. 그들은 명분과 의리를 무겁게 여기면서 몸을 던져 역사적 책무를 다하려고 길을 나섰다. 급히 재산 일부를 팔아 재원을 마련하고 가족들을 대동하여 멀고 험한, 그러면서도 기약 없는 길을 나선 것이다. 부녀자만이 아니라 임신부도 동행하는 고통의 길이었다. 안동에서 출발하여 기차를 탈 수 있는 추풍령까지 걸어간 1911년 겨울은 춥고 고달픈 길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 내려, 얼어붙은 강을 건너 영하 30℃로 내려가는 만주에 도착했다. 그곳에 정착하는 과정은 대단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처럼 강건한 정신을 가졌으므로 한두 집이 아니라 몇 개의 문중이 어울려 집단으로 망명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에서 누구보다 안동인들의 위상이 뚜렷했다고 한다. 안동인들은 1911년 2월 초 압록강 건너 류하현 삼현포 추가가(柳河縣 三源浦 鄒家街)에 도착하자마자 경학사(耕學社)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사업이었다.

김 교수는 “안동인이 펼친 독립운동은 항일투쟁기 전 시기를 이어갔는데, 그 지속성이 놀랍다”고 말했다. 의기에 넘치는 이러한 안동인의 에너지 분출에 대해 그는 “안동문화권 유림들이 가진 명분과 의리중시현상이 민족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정신적인 바탕이라면, 이를 종적으로 묶어주는 골간은 퇴계학맥이다. 그리고 횡적으로 이를 결속하는 것이 혼맥이다. 학맥과 혼맥이 그물의 종횡으로 얽혀, 그것도 촘촘하고 강하게 엮여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고 해석했다.


#4. 독특한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安東學’ 존재

안동은 유일하게 ‘안동학(安東學)’이라는 지역 학문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한다. 국내외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회문화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경북도가 새 도읍지로 정한 안동·예천지역은 먼 옛날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 그 중심에 서서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이 사는 ‘의기(義氣)의 땅’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검무산 자락에 뿌리를 내린 경북도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특히 정신적인 측면에서 국가 가치를 수호하고 국가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심충택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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