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판 소쇄원’심원정 복원·보존에 헌신 조호현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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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29   |  발행일 2015-05-29 제37면   |  수정 2015-05-29
“심원정은 영남 유일의 園林…송림사와 마주보고 있어 儒·佛의 포용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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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민간 문화유산 보존에 헌신하고 있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소중한 문중재산인 심원정을 기증한 조호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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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가 남긴 심원정 지키려고
서울서 특수가스사업 하다 귀향

‘2014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
내셔널트러스트에도 채택되었죠
복원·보존 위해 운영委 발족할 것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바로 맞은편 심원정(心遠亭). 낙락장송과 대숲이 입구를 가려주고 있다. 바람이 불자 대나무 사이로 정자의 불빛이 장명등(長名燈) 불빛처럼 스며나왔다. 여기는 평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무릉도원’ 같은 곳이다. 호남 지역에선 이런 운치있는 공간은 ‘원림(園林)’이라 한다.

지난 2일 밤 심원정에서 아주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제1회 심원정 고택 음악회’가 열렸다. 정자 아래 수십평은 될 법한 너럭바위에 마련된 객석에서 올려다 본 심원정 누마루는 지역 국악인의 풍류 한마당 무대로 변해 있었다. 오묘한 빛깔의 조명까지 곁들여졌다.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공연은 때론 종묘제례악처럼 엄중했다가 어느 땐 가야금·대금 산조처럼 흥취 가득하기도 했다. 주위 풍경과 공연이 궁합이 잘 맞아 심원정 음악회는 금세 입소문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음악회는 단순히 공연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칫 사라질 우려가 있는 영남 유일한 ‘원림(園林)’인 심원정을 지역 국악인 스스로 지키기 위해 착안했다.

심원정은 한국의 문화유산 관리문화의 현 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리트머스시험지’다. 지어진 지 80년, 하지만 심원정은 세상의 관심권에서 밀려 절벽 앞에 다다랐다. 문화재 관계자는 물론 지자체의 주목도 못받았다. 자칫 상업시설로 사라질 뻔했다가 기사회생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 과정이 무척 감동적이다. 관리를 후손의 몫이라고 관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최근 ‘심원정 살리기’를 위해 두 단체가 결성됐다. 창녕조씨 석당공파 기헌선생기념사업회(회장 조수학)와 기헌국악예술단(예술감독 박세홍). 그 밖에 팔거역사문화연구회, <사>팔공산 문화포럼, 대구경북연구원, 칠곡향교, 팔공산 연구소, <재>영남문화재연구원 등 뜻있는 연구단체와 개인이 의기투합했다. 심원정이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문화유산이란 확신 때문이다.

심원정의 후손인 조호현씨(56). 그는 심원정 살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이런 일도 일종의 ‘문화독립운동’이라 여긴다. 심원정을 지은 조씨의 증조부(기헌 조병선·1873∼1956)는 ‘이 공간이 비록 지금은 내가 관리하고 있지만 실제는 내 것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다’는 유지를 남겼다. 증손인 그도 그 유지를 받들었다.

심원정은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조선 중기 호남 최고의 원림으로 손꼽히는 담양 소쇄원(瀟灑園)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멋지게 복원될 수 있을까.

▲ 어떤 연유로 제2의 삶을 증조부가 남긴 심원정 지키기에 투신할 수 있었나요.

“서울에서 특수가스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먹고사는 게 너무 바빠 심원정을 잠시 잊고 살았어요. 그런데 제 피 속엔 뭔가 모를 옛것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죠. 몇 년 전 심원정에서 기거했던 모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집안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심원정만은 팔지 말고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유언을 남긴 겁니다.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게 올라오더군요. ‘내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됐던가. 그래, 조상의 음덕’이란 말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3년 전인가 미련없이 짐을 싸고 낙향했습니다.”

▲ 심원정이 예전 그대로의 풍광을 갖고 있던가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문중 재산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어느날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거나 개발을 통한 수익향상의 수단으로 추락했습니다. 이 과정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선산이나 가옥, 소장가치가 높은 명승지 등이 마구 철거됐습니다. 또한 지역민도 특정 공간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걸 극도로 꺼립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활동이 제약된다고 생각한 거죠. 심원정도 그런 제약조건 속에 흉물로 방치되고 있었던 거죠. 일부 건물은 식당으로 팔려나가고, 일부 대문은 도둑맞고, 지속적으로 손을 보지 못해 곳곳이 허물어지고 빗물이 샜습니다. 증조부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 심원정에 숱한 스토리가 묻어 있다고 하던데요.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니 심원정이 간단한 누정이 아니더라고요. 한학자였던 제 증조부께서 1937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심원정 근처 송림사, 개천, 절벽, 폭포, 너럭바위, 대숲, 소나무, 연지 등 25가지 풍광을 만들고 그것마다 일일이 이야기를 만들었더군요. 지역 첫 스토리텔러 같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당신은 그걸 토대로 서거정의 대구십영(大邱十詠) 같은 심원정 25영(詠)이란 연작 한시를 남겨 편액으로 걸어놓았습니다.”

▲ 25개 포인트를 다 확인해 보셨겠군요.

“물론입니다. 심원정은 별장 안으로 구야천이 흐르는 계류형 원림입니다. 차례림으로 동쪽에는 숲을 만들어 ‘동취병(東翠屛)’이라 하고 서쪽에도 역시 숲을 만들어 서취병, 정자 뒤에는 인공으로 조산을 만들어 ‘학림산(鶴臨山)’이라 짓고 외부와 차단하였죠. 증조부는 25영을 자신만의 소우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는 물속의 한 바위를 ‘지주암(砥柱巖)’이라 하여 중국 황하의 격류 속에서도 우뚝 솟아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바위와 같은 이름을 지었습니다. ‘은둔군자’를 상징한 거죠. 특히 심원정 맞은편 절벽의 한 포인트를 ‘은병(隱屛)’이라 했는데 이는 주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무이정사가 있던 핵심적인 공간의 명칭과 같습니다.”

▲ 그밖에 25영 중에는 어떤 기록할 만한 게 있습니까.

“정자의 실내 공간 5곳, 실외 자연경관 20곳을 합쳐 25영으로 만들었어요. 제1영은 심원정 편액인데 누가 썼느냐 하면 합천 해인사에도 묵적을 남긴 대구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인 회산 박기돈입니다. 구암(龜巖)이란 금석문 및 탁본, 명상 바위인 성석(醒石), 평상시는 여느 절벽이었다가 농사철이 아닐 때는 폭포가 되는 은폭(隱瀑), 구기자 나무 샘으로 불리는 기천(杞泉), 느티나무 언덕을 알리는 입석인 괴강(槐岡), 군자소에 둑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을 때 세운 입석인 류제(柳堤), 심원정 안과 밖의 경계석의 일종인 석비(石扉), 군자소에서 흘러 넘친 물을 가둬 목욕을 할 수 있는 탕지(湯池) 등입니다.”

▲ 아직 발견하지 못한 포인트도 있습니까.

“은폭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서대(西臺), 동쪽 반석인 동반(東磐) 등 5군데의 금석문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유적지를 발굴하는 고고학자로 살고 있습니다. 양수기를 동원해 뒤덮인 흙을 파내고 있습니다.”

▲ 복구를 하려면 적잖은 비용이 들고, 사실 이런 일은 민이 아니라 관에서 추진해야 될 것 같은데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복구비가 만만찮아 절대 혼자 할 수 없다고 보고 믿을 만한 기관에 기증해서 관리하도록 하는 게 더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최근 송림사와 의논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심원정은 ‘2014년 올해의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에 지정돼 문화재청장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어떤 기관이죠.

“세계내셔널트러스트 기구(INTO)의 정회원입니다. 시민들의 자산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 미래세대까지 영구히 보존활동을 전개하는 단체죠. 2000년 출범했는데 현재 멸종 위기식물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 동강 제장마을, 청주 원흥 이방죽 두꺼비 서식지, 연천 DMZ 일대 임야, 최순우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등 모두 8건을 채택했는데 이번에 심원정도 추가됐습니다.”

▲ 심원정이 영남 유일의 원림이라고 하는데 원림이 정확하게 어떤 공간이죠.

“일명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도 불리는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 강진의 다산초당처럼 빼어난 풍광을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끌고 들어와 거기에 인공적인 산과 수목을 장식하고 정자와 누각, 연못과 작은 다리, 심지어 폭포와 풍경에 맞는 입석 등을 세운 자연친화적 별장형 정원이죠. 모든 걸 인공적으로 만든 정원과는 차이가 나죠.”

▲이런 공간이 왜 영남에는 거의 없죠.

“전라도는 조선의 대표적 유배지라서 유달리 원림이 무성했지만 영남은 유배문화가 전무한 실정이라서 이런저런 누정은 많아도 심원정 같은 원림은 밀양 월연정을 제외하곤 유일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죠.”

▲ 유학자 공간인 심원정 맞은편에 송림사란 불교공간이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게 참 흥미롭네요.

“대립과 반목질시에 길들여진 조선조 사대부와 달리 증조부는 포용과 배려의 차원에서 송림사를 심원정의 연장에 두었는데 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하더군요. 불교와 유교가 지척에서 일심동체한 경우도 드물겁니다.”

▲ 심원정 살리기에 지역 국악인이 동참한 게 보기좋네요.

“공간을 본 지역 국악인들이 ‘이것만은 살려야 된다’면서 맨 먼저 발벗고 나섰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 겸 피리합주단 시누대 대표인 박세홍 예술감독을 비롯해 지역 국악인 20명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기헌국악예술단을 창단했습니다. 이들은 매월 음력 보름을 전후해 정통국악만을 중심으로 한 풍류한마당을 펼쳐나가겠답니다. 출연료 한푼도 받지 않고…. 눈물나게 고맙죠. ”

▲ 향후 심원정이 어떻게 운영될 계획입니까.

“보존을 위한 프로젝트의 명칭은 ‘심원정 복원을 통한 과거로의 여행’입니다. 별도 기구로 ‘심원정운영위원회’가 발족될 겁니다. 3년간 약 3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며 학술연구·복원·시민참여 등 3개 분야로 나눠 진행될 겁니다. 학술연구 파트에선 기헌 선생의 문집에 담긴 문학세계, 복원 파트에선 심원정이 설립됐던 당시의 원형 그대로 되살려낼 겁니다. 담장, 마루, 지붕 등이 복원되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철거되고 물길도 예전대로 가설할 겁니다. 성균관대 건축과 윤인석 박사, 서울여대 조경학과 이은희 교수, 조경포레 연구소장 전은정 박사 등이 동참할 겁니다. 복원이 완료되면 불교와 유교가 복합된 21세기형 복합문화행사가 시민참여로 이뤄질 겁니다. 내셔널트러스트 산하 문화유산위원회가 일을 맡기 때문에 잘될 겁니다. 참고로 서울 성북구의 미술사학자 해곡 최순우 선생의 한옥을 12억원의 시민성금으로 매입한 후 2년간 보수공사를 통해 현재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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