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무명 작가로 산다는 것은…마흔아홉살 시인 김정용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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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26   |  발행일 2015-06-26 제37면   |  수정 2015-06-26
“詩보다 시적 삶이 먼저더라…첫 시집? 등단 19년째 여전히 퇴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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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젊은 날의 김수영 시인을 떠올리는 도발적이면서도 당찬 기운의 눈빛을 가진 김정용 시인. 올해 칠곡군 북삼읍의 한켠에 놀이터 같은 카페를 차려놓고 좋은 음악과 책, 그리고 미술과 허교를 하면서 줄기차게 놀고 있다. 그의 19년 시적 몸부림에서 지방의 무명 시인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 가를 가늠케 해준다.

 

초승달

김정용

이미 오래 전 나는 가슴 한쪽을 뜯어버렸다
더는 상하지 말라고 던져버렸다
남은 가슴으로도 충분히 아플 수 있으므로
돌연 추억이란 게 필요할 때
피도 눈물도 나질 않는 세상살이라 느껴질 때
그런 내가 대낮인데도 하늘을 훔쳐보게 될 때
남은 가슴을 퍽퍽 치면
등뒤의 어둠이 갈라지며
어둠이 토해낸 비명처럼 떠오를 것이다
머잖아 내게도 그런 날이 잦을 때
꺼내 와서 채워보리라
남은 가슴이 받아들일 힘이 있는지
꺼내와서 맞춰 보리라

 

난생처럼 그 시인 때문에 ‘북삼읍 인평리’란 동네를 보게 됐다. 북삼읍은 구미시와 칠곡군 석적읍·약목면에 포위돼 있다. 등단 19년째를 맞는 김정용 시인(49). 가수 장기하의 노래처럼 ‘별일없이 산다’. 원고 청탁도 전멸이다. 돈만 몇푼 있으면 컵라면처럼 살 수 있는 첫 시집인데도 그걸 못낸 채 20여년 책만 4천여권 읽었다.

최근 인평리의 한 상가 구석자리에 ‘카프카’란 카페를 오픈했다. 기자도 인터뷰를 위해 거기를 찾았다. 손님이 뜸해도 너무 뜸하다. 그가 주인 겸 손님. 카페 주인이 되기 전 그의 일과는 칠곡군 지천면 신리 자택 방구석에 처박혀 책 읽고 재즈 듣고 느낌 오면 사나흘 내리 글만 적는 거다.

1996년 그가 등단했던 지역의 시 전문잡지 시와반시에 1년 넘게 농밀한 문체의 ‘재즈 아포리즘’을 콸콸 흘려보냈다. 글맛이 눅진거려 화제였다. 최근에는 국내외 그림에 얽힌 산문을 일기처럼 적고 있다. 그렇지만 그뿐이다. 책내줄 출판사도 자비 출판할 돈도 없다. ‘아님 말고’ 기질 탓에 이 어려운 국면을 어찌 어찌 버틸 수 있었다.

이젠 카페가 놀이터.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집어등 켜둔 배처럼 ‘정박’해 있다. 심심하면 카페 옆 콘크리트 길에 핀 두 포기의 풀과 대화를 한다. 쉰을 앞뒀지만 아직 독신.

그의 집은 노모(老母)의 집에서 1.5㎞ 떨어진 지방도로변에 있다. 밥 먹을 때만 잠시 노모를 뵌다. 노모의 내공이 그보다 더 대단하다. 여느 부모처럼 ‘결혼·백수타령’이 일절 없다.

등단했을 때 지역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가끔 게릴라처럼 출몰했지만 그뿐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여러 일을 전전했다. 등단 즈음 주방용품을 트럭에 싣고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국수도 팔아봤다. 글쓰기 학원에 이어 몇년전부터는 ‘세상의 모든 그림’이란 쇼핑몰도 운영중이다. 그런데 도무지 돈이 될 것 같지 않다.

테이블이 딱 두 개 밖에 없는 카페. 에곤 실레, 클림트, 조지아 오키프, 리히텐슈타인 등 해외 유명작가의 카피 그림이 카페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가 수준급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직접 드립해 기자에게 내민다.


▲ 문학청년 시절이 궁금하다.

“20대초반이었나, 수원시 세류동 고향 선배 가게에서 일 도와주면서 문학에 빠진다. 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카프카의 ‘성’,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등을 읽으면서 문학적으로 미쳐갔다. 평생 책만 읽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겠다 싶었다.”

▲ 시인이 시집을 못 내면 식물인간 아닌가.

“못 내는 게 아니고 퇴고중이라 여긴다. 시집 내는 게 목적이었다면 1~2년에 한권 정도는 어떻게 해서라도 냈을 것이다. 어떤 시집인가가 더 중요하다. 등단도 어렵지만 제대로 된 시집 만들기가 더 어렵더라. 내 원고가 몇몇 괜찮은 문예지의 최종심까지 가곤 했지만 그게 끝이더라. 실력도 실력이지만 우리 문단은 그래도 뭔가 끈이 있어야 크는 것 같다. 난 실력도 그저 그렇고 끈은 절벽이니 늘 이 모양인가. 원고를 청탁할 때 누구한테 하겠나. 중앙 위주이고 지방도 유명하거나 잘 아는 시인한테 청탁할 거다. 그런 흐름에 편승 못하면 시만 적고 발표는 못하는 ‘반쪽 시인’으로 추락한다. 앞으로 특정 시인의 시를 독자와 관계자가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분기탱천하는 무명시인의 빼어난 시가 편견과 끼리끼리 문단권력에 의해 묵살되고 고사되고 왕따된다고 하면 누군가 나서 ‘문단 민주주의’를 구현시켜야 된다.”

 

등단 땐 지역 시단 주목받아
하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문단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끈이 있어야 크는 것 같더라

 

방에 박혀 책 읽고 재즈 듣고
느낌 오면 사나흘 글만 적어

 

먹고 살려고 온갖 직업 전전
지금 테이블 두개 카페 운영

 

주변의 시선은 신경 안 쓴다



▲ 김 시인이 문단 민주주의 위해 나서보라.

“난 이렇게 독하게 책 읽으며 싸우고 있다. 원고청탁 관계없이 계속 문학적으로 살고 있다. 버티는 게 이기는 길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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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얘기 좀 해보자. 오래 책에 빠져 살고 있는데 엄청난 내공을 가진 책을 좀 언급해달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스완네 집 쪽으로’ 장에 작가가 왜 자기의 작업실에 틀어박혀야 하는지, 어떻게 문학은 탄생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 있다. ‘오직 그곳만이 독서·몽상·눈물과 쾌락 같은, 남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고독한 나의 몰두가 시작될 때마다 늘 자물쇠를 잠그고 틀어박힐 수 있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폴 오스터의 소설도 좋아한다. 그의 소설에는 ‘굶는’ 인간들이 등장해서 좋다. 오스터는 지금도 수동타자기로 글을 쓴다고 하는데 가끔씩 그의 글을 읽으면 머릿속에서 타자기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문장의 치밀함, 열린 사고. 지금 우리 문학의 편협·소심함·획일성에 비추어 본다면 가히 혁명적인 책이었다고 본다. ‘티벳 사자의 서’에는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이 내재해 있다. 그 신은 바로 창조의 힘이다. 이 힘을 통해서 영혼은 생각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 의해서 영혼들은 서로 차이를 갖게 된다. 결국 생각은 모든 존재를 결정하는 조건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에 감전됐다.”

▲ 특히 카프카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어떤 작가인 것 같은가.

“한 마디로 지독한 문장가이며 선승에 버금가는 깨달은 사람이다. 그의 아포리즘 중에 ‘진실이란 밧줄은 걸려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란 대목이 죽인다. 또 기막힌 문장이 있다. ‘나와 세계와의 싸움에서 항상 세계의 편을 들어라’고 갈파했다. 섬뜩한 표현 아닌가.”

▲ 요즘 젊은 시인들 시는 이름만 가리면 다 같은 시처럼 보일 정도로 미래파적으로 난해한 것 같고 유명 시인의 시는 상투적이고 밋밋한 것 같은데….

“몇 해 동안 거의 시집을 사서 읽지도 않았다.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과도 교류를 끊었다. 시 읽기를 멀리했기 때문에 이 즈음의 시에 대한 정보와 판단도 없다. 그래서 요즘 내 문학은 문학이 아니고, 그저 문예 수준이다. 다만 굳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미래파 시나 시를 수 십 년 썼다는 시인들이 소위 막판에 내놓는 ‘도 트인’ 시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헛소리거나 깨달았거나 뭔가 알거나 뭔가 아는 척 하는 것이거나 쓰는 척하고 사는 척하고 읽은 척하고 깨달은 척 하는 것이다.”

▲ 대구의 이성복 시인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맨 처음 사서 읽었던 시집이 바로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였다. 두 달 동안 책을 놓지 못하고 쉬지 않고 읽었다. 애인으로 만들고 싶은 여자의 집 앞에 서성거리듯이 읽었다. 지금도 선생님의 시는 애인이고 싶은 그녀의 집 근처를 서성거리게 만든다.”

▲ 장가도 안 가고 백수처럼 사는 것에 대한 주위 사람의 반응은 어떤가.

“등단 3년 후 아버지에게 등단 사실을 얘기했다. 그때 맥주 한잔 하면서 아버지는 내게 여행 좀 많이 다니라고 하셨다. 그게 전부다. 시보다 시적 삶을 사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문학 공부하면서 알았다. 주변 시선은 내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여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다. 결과를 모르고 바라지도 않는 물 붓기다.”

▲ 현대미술에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림에 대한 흥미는 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서점에 나온 그림 관련 주요 해설서는 대충 다 독파한 것 같다. 바스키아처럼 28세에 요절한 한없이 고독한 에곤 실레의 그림을 특히 많이 공부를 했다. 잭슨 폴록, 드 쿠닝, 클라인 같은 ‘액션페인팅’ 그룹과 마크 로스코와 같은 ‘색면추상화가’의 미학세계를 더듬고 다녔다. 단순히 글쓰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들여다보고 시작하다가 세계 유명 미술관에 소장된 온갖 그림을 모두 감상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광기적 독서욕이 그림욕으로 진화한 것이다. 몇 해 전 미국에 가서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좋은 그림파일을 구해서 지금은 쇼핑몰 ‘세상의 모든 그림’을 통해 카피 그림을 팔아먹고 있다.”

▲ 대구 있다가 서울간 장정일 시인도 종일 재즈를 탐식한다는데 좋은 시와 좋은 재즈가 함수관계가 있는 것 같다.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죽도록 들어왔던 재즈는 임프로비제이션, 즉 즉흥성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감흥과 감각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조화와 개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음악이다. 일반적인 음악 감상과 달라서 적극적으로 들어야 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 처음에 단순히 흘려듣기부터 하다보면 조금씩 그 깊이와 색채감, 혹은 질감과 텍스처를 알게 된다. 재즈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스윙감’이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스윙은 우리를 으쓱으쓱하게 한다. 그것에 젖어 들면 안식이 있고 편암함이 있고 해학이 있다. 반음계 재즈로 분류될 수 있는 ‘비밥’은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반음계를 도입해서 복잡하고 즉흥적인 음의 연출이 가능해진다.”

▲19년간 참 많은 생각을 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관망했을 것 같다.

“지금은‘자기 격발의 시대’다. 이젠 한 개인이 기댈 이데올로기도 사상도 종교도 점점 없어지고 있다. 예술 또한 인간에게 어떤 효용성이 있을까 싶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보다 그냥 자기 멋에 도취해 자기 열정을 제 맘대로 격발하다가 불꽃처럼 사그라들고 말 것이다. 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이 필요한 세상으로 가는 것 같다.”

▲젊은 시인들과 나이든 시인 사이에 거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공감대 형성할 필요가 없다.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무슨 대동단결인가. 남이 목숨 걸고 적은 글을 내편 네편 안 가리고 죽도록 읽어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사람 챙기지 말고 작품에 관심가져야 시문학이 산다. 내 취향의 시만, 유명한 시인의 시만 자꾸 읽으면 그건 여야 정치공방과 다를 게 뭐가 있나.”

▲ 요즘 하루 일과는 대충 어떤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게 가서 청소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하루에 수십 번 손 씻는 일을 제일 많이 한다. 나와 동시간에 함께 손 씻는 사람을 생각한다. 글쓰기·책읽기·음악듣기·그림보기를 매일한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기억하고 살고 있다. 좋은 시를 읽었고 기억하고 있다. 좋은 그림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 딱히 되고 싶은 뭐가 없다. 지금이 딱 좋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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