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독 탄 사이다에 물 탄 수사

  • 명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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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28   |  발행일 2015-07-28 제30면   |  수정 2015-07-28
[취재수첩] 독 탄 사이다에 물 탄 수사

지난 14일 오후 4시30분쯤 경북지방경찰청 기자실 안.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던 삭막한 기자실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됐다.

발단은 경북소방본부에서 흘러나온 한 약식 사건보고 문건에서 시작됐다. 한 마을의 할머니들이 음료를 나눠 마신 뒤 의식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들이 마신 음료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 상주 ‘살충제 사이다’사건이 세상에 서막을 올린 순간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사흘 만에 유력한 용의자 박모씨(여·83)를 붙잡았고, 27일 그를 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벌써부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수사 과정은 썩 미덥지 못했다. 언론에 발표한 수사 상황을 두 차례나 번복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용의자 측의 증거 조작을 우려한 경찰이 언론 브리핑 때 사실을 조금씩 왜곡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명 ‘물타기’를 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경찰은 그러다가도 스스로 수사 상황을 헷갈려하며 수사에 허점을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경찰의 첫 실수 혹은 물타기는 사건 발생 다음 날 진행된 첫 언론 브리핑 자리에서도 드러났다.

할머니들이 나눠 마신 음료에서 검출된 농약이 살충제가 아닌 제초제라고 밝힌 것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이를 물타기였다고 자평하는 분위기지만, 한동안 수사팀 수뇌부가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신론이 일기도 했다.

경찰의 둘째 실수도 물타기 의혹이 있다. 압수수색을 마친 용의자의 집에서 뒤늦게 농약병이 발견됐는데, 이를 경찰이 또 “제3자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다음 날 경찰은 “원래 용의자 집에 있던 것이다. 압수수색 당시 중요치 않게 여겼던 것이라 두고왔다”며 말을 뒤집었다. 경찰의 명백한 실수처럼 보였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또 한번의 물타기 시도라는 추측이 나왔다. 당시까지도 범행을 강력히 부인하던 용의자 측을 흔들기 위해 경찰이 ‘형체 없는 제3자’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찰이 하루 만에 실수를 인정하는 바람에 일각에서는 ‘경찰 내부에서도 물타기 작전이 소통되지 않았고, 결국 헛수고만 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타기를 시도하다 스스로 수사 상황을 헷갈려 하는 모습을 비쳤다는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정리됐건 간에 이 두 번의 상황 모두 경찰의 공신력에 큰 상처를 입히게 됐다. 경찰 말을 믿고 기사로 옮긴 언론도 대중에게 거짓말쟁이가 돼 버렸다.

이제 사건 진실공방의 바통은 검찰로 옮겨간 상황이다. 용의자 박 할머니의 범행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기자는 이번 사건 수사팀에 분명히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그때 당신들이 저지른 실수는 정말 실수였는지 아니면 수사 기법의 일환으로 시도한 물타기였는지를. 경찰을 믿고 기사를 전달하는 기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니 말이다.
명민준기자 <2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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