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청송 .7]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청송의진’(上)- 의병 결성 배경과 창의

  • 배운철 백승운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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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03   |  발행일 2015-08-03 제12면   |  수정 2015-08-03
일제침탈 격동기 유림들의 ‘爲國擧義(위국거의·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 큰 물줄기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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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전천 현비암 앞의 백사장은 청송의진이 대장기를 올리고 첫 훈련을 했던 곳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청송은 늘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 첩첩산중의 산골이었지만 청송인은 역사의 전면에 나서 큰 물줄기를 이루었다. 특히 한민족 의병사에서 청송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왔다. 임진왜란 때는 각 문중의 유림이 군자금과 병사를 모아 의진에 참여해 결연히 맞섰다. 병자호란 때도 이 지역 출신들은 분연히 일어나 국권 수호에 나섰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는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로 기록되고 있지만, 청송 출신 윤충우는 이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며 목숨을 바쳤다. 불의에 맞서는 끈질긴 저항의식과 유교사회에서 물려받은 충과 의리는 청송의 고유한 정신문화다. 이러한 청송의 뿌리 깊은 정신은 일제에 항거한 의병으로 다시 이어진다. 이 지역에서 결성된 청송의진은 한민족 의병사에서 큰 획을 그은 역사로 남아 있다.

#1. 나라를 위해 뜻을 모으다

격동의 1896년 3월12일(음력 1월29일)

곧 눈이라도 내릴 듯 스산한 날씨임에도 청송 고을 중심에 위치한 향청에는 아침부터 운집한 100여 명의 유생으로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이틀 전인 3월10일에 부동면의 서효원(徐孝源)이 다급히 발송한 효유문(曉諭文)을 읽고 청송의 각 고을에서 모여든 유생들이었다.

효유문은 청송의진 결성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위로는 대의(大義)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아래로는 고을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란 두 가지 절실한 호소를 담고 있었다. 즉 국가에 대한 ‘위국거의(爲國擧義)’와 고을에 대한 ‘자수지계(自守之計)’를 근거로 창의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격문이었다.


단발령·명성황후시해로 전국 곳곳서 의병 봉기
1896년 3월 부동면의 서효원이 발송한 격문에
지역 유생 100여명 모여 대의 따르는 의진 결성
대장으로 심성지 추대…재야유생 지도부 맡아

병사부 주력은 농민들…포수·보부상까지 가세
첫 훈련지 남천 백사장 남정네로 저잣거리 방불
군자금은 차출금·배당·의연금 등으로 조달해
안동·영덕 등 경북지역 의진과 협조체제 구축


당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처에서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을 타도하기 위한 의병들의 창의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안동에서는 이미 두 달여 전에 안동의진이 결성되었고 주변 군현에서도 창의가 잇따랐다. 3월2일경에는 청량산의진의 청량격문(淸凉檄文)에 이은 안동의진의 화산격유(花山格諭)가 날아들었다. 두려움을 느낀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청송군수 남유희가 도주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창의를 준비하던 청송지역 유생들이 의진 결성을 더욱 서두르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계기가 있다. 3월7일에 안동의진의 소모장이던 류시연이 30명의 포졸을 이끌고 청송군으로 들어와 모병을 빙자하며 청송군의 무기고를 탈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을의 관졸과 군민들이 나서서 일단 군기를 탈환하기는 했지만 상황이 화급했다.

“시간을 지체하다간 청송고을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며, 시정의 물의도 소란하니 부득이 서둘러 의병소를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서효원의 말에 향회에 참가한 유생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중지(衆志)가 모아지면서 곧 의진 결성이 구체화되었다. 유생들은 먼저 의병을 이끌 대장으로 청송이 본관인 심성지(沈誠之)를 추대했다. 이어 사흘 뒤인 15일에 다시 회합하여 조성박(趙性璞)을 부장, 권성하(權成夏)를 우익장, 김상길(金相吉)을 좌익장으로 하고 참모와 서기를 뽑아 최초의 진용을 편성했다. 비록 여타 지역에 비해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청송지역 유생들의 창의에 대한 적극적인 찬동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월16일, 마침내 남천의 백사장에서 첫 훈련이 시작됐다. 백사장은 의진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든 남정네로 저잣거리를 방불케 했다. 청송과 인근 고을의 양반 유생과 농민들이었다. 나라와 고을을 수호하자는 일념에 자진하여 의진에 참여한 것이다. 마침내 대열이 정비되자 선두에 대장기가 드높게 솟았고, 의병들의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서효원이 의병의 출사를 천지신명께 고하는 축사(祝辭)를, 김상길이 의병활동의 각오를 담은 창서사(唱誓辭)를 지어 낭독하여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청송의진 진용은 의병부대의 일반적인 편제에 따라 창의장 심성지를 대장으로 하고 부장, 좌우익장, 전후방장 등의 지휘부와 참모, 서기 등의 의병장을 보좌하는 직위로 편성되었다.

#2. 의진의 진용을 갖추다

청송의진 지도부는 80여 명으로, 관직경력이 없는 이 지역의 재야유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청송 각 지역에 세거하며 혈연과 지역적 연고, 오랜 학통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 가문과 일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의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병사부는 포병과 보부상, 농민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실질적인 전투를 맡을 100여 명의 포병은 포수나 혹은 관군에서 이탈한 자로, 전투능력에 대한 일정한 급료를 받는 용병적 성격으로 의진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청송의진은 포병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가져야 했고, 이는 내부적으로 갈등 요소가 됐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송의진의 주력은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됐다. 내부 갈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의진 지도부인 유생들의 사회·경제적 예속하에 있던 농민층을 주력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전투경험이 부족한 관계로 군량과 군마, 탄약, 군수품 등을 운반하는 비전투원의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의병부대의 기세를 돋우는 주력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의진에 소요되는 경비와 급료는 지주나 부유층에게서 군수금 명목으로 징수하는 차출금, 각 마을 단위 문중에 원천적으로 배당되는 문배전(門排錢), 또 창의에 앞장서거나 동조하는 유생들의 자발적인 의연금 등으로 조달되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청송의진은 점차 진용이 정비되었고, 필요한 군량미와 군수품도 얼추 갖추어졌다. 그러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를 구하는 일이 용이치 않았다. 유효 사거리가 20보 내외인 화승총(火繩銃)과 칼이나 창 따위의 재래식 무기가 고작이었다. 게다가 기동력에 필수인 군마조차 앞서 창의한 안동의진과 청량의진으로 징발된 상태여서 더욱 그러했다.

무기와 장비가 열악한 터에다 양반유생이 대다수인 청송의진 지도부는 병법이나 훈련, 전투를 지휘할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취약점을 알고 있던 지도부는 병법에 익숙한 교관을 선발해 누차에 걸쳐 진법과 사격연습에 노력을 쏟았고, 조금씩 전투의병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이와 더불어 청송의진은 창의 초기부터 안동과 예안, 진보, 영양, 의성, 영주, 영덕의진과 격문과 통문을 수발하며 서로 밀접하게 상호협조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흥해, 영덕의진과는 ‘일이 급하면 서로 돕는다’는 약속 아래 군사적인 협력체계를 갖추었다. 5월9일에는 흥해와 영덕에 군사를 소모하기 위해 지도부 몇 명과 70여 명의 의병을 파견하여 흥해 출진소(出陣所)를 차렸다. 아울러 청송의진은 경주지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청송의진의 참모 홍병태(洪秉泰)를 경주지역의 소모장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4월2일 청송의진에 한통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대구의 관군이 군위와 의성을 공략하고 안동으로 진군하고 있으니 속히 군사와 탄약을 지원해달라는 격문이었다. 지도부가 서둘러 안동부로 군사를 움직이려는 찰나에 안타깝게도 이미 안동부가 관군의 손에 소실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처럼 주변 의진과 격문과 사통을 지속적으로 주고받던 청송의진이 의성의진, 이천의진과 3진 연합을 맺은 것은 5월13일이었다. 관군의 공격으로 황산에서 대패한 의성의진의 김상종(金象鐘)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청송으로 들어왔고, 때마침 의성의진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안동의진의 김하락(金河洛)이 의성의진의 뒤를 따라 청송 화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하편에 계속>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공동기획=청송군


이야기 따라 그곳&

청송향교는 의병 결성의 출발점…자체 진중기록 ‘적원일기’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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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진의 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향회를 처음 연 청송향교.

1896년 3월12일(음력 1월29일) 결성된 청송의진의 출발점은 청송향교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안동대 교수)이 2003년 청송의병 107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의진 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향회를 연 곳은 청송향교 명륜당이다. 김 관장은 또 “청송의진이 처음 결성된 장소는 정확하지 않지만, 의병 결성을 위해 향회가 열렸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향교나 유향소가 모임의 장소였을 것이다. 청송군지에 향교에 100여 명이 모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청송의진의 진중기록인 적원일기(赤猿日記)에도 향회 이야기가 나오는 점을 미루어 보면 거병 시기에 향교가 주된 논의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청송의진의 본부는 청송도호부 객사였던 운봉관과 청송심씨 시조묘의 제각인 찬경루로 알려져 있다. 적원일기에는 ‘창의 직후에 대장기를 객사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객사에 대장이 머물며 의진의 편제를 확정하고 훈련을 지켜보았다’고 적고 있다. 의진이 결성된 후 첫 훈련을 시작한 ‘남천 백사장’은 지금의 용전천 현비암 앞의 백사장이다. 용전천은 ‘파천’ ‘남천’ ‘읍전천’으로 불렸다. 실제 객사인 운봉관에서 바라보면 훈련장소였던 백사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송의병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기록은 ‘적원일기’다. 적원일기는 청송의진에서 자체적으로 기록한 일기식의 진중 기록으로, 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2일(음력 11월19일)부터 본진이 면·군체제로 전환하게 되는 5월25일(음력 4월13일)까지 85일간의 기록이 적혀 있다. 특히 의병의 결성과정과 의진 편제, 전투상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른 진중기록과는 달리 지도부는 물론 병사부의 구성과 군자금 조달 과정, 인근 지역 의진의 동향 등도 사실적으로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때문에 적원일기는 청송의진뿐만 아니라 경북 내륙권에서 전개된 의병의 전반적인 동향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청송=배운철기자 baeuc@yeongnam.com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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