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역사가 녹아있는 근대건축 .7]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

  • 이지용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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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01   |  발행일 2015-10-01 제7면   |  수정 2015-10-01
조선수탈의 거점서 한국근대화 이끈 금융기관으로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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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대구근대역사관 제공>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은 1906년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1918년 합병해 설립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다. 조선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의 특수은행으로,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기관 중의 하나이다.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조선 수탈의 양대 축을 이루는 특수목적 금융기관이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고, 중일전쟁 이후로는 약 8년 동안의 전시 체제 속에서 채권발행과 강제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한 군수산업부문에 이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에는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고, 광복 이후 1954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日帝, 조선식산은행 지점으로 건립
산미증식계획 자금 공급 기관 역할
광복 후 한국산업은행 지점 탈바꿈
현재는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사용

철근콘크리트구조 르네상스풍 건물
남·서면에 현관…중앙에 포치 배치
지붕, 슬래브로 처리해 수평선 강조
내부는 인조석 물갈기·타일로 마감


일제가 1931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한 이 건물은 1954년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하면서 내부 칸막이 마감재 등을 개조하였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는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연면적 1천971㎡이며 지하 1층, 지상 2층의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되어 있다. 외관은 르네상스풍이다. 남면과 서면에 현관을 두고 포치(porch)를 중심으로 각각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1층에는 영업장, 지점장실, 금고, 계단실 등을 두었고, 2층에는 계단실과 연결되는 ㄱ자형의 중복도를 따라 각 실(室)을 배치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디딤돌로 하부벽을 구성하고, 상부벽은 당시 독일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진 흰색 타일을 붙였다. 도로에 면하는 남쪽과 서쪽의 창간벽은 벽면에서 약간 돌출시켜 기둥처럼 만들었다. 건물의 양 모서리와 각 기둥의 주두는 몰딩으로 장식하였으며, 기둥 상부와 벽면에 나뭇잎 모양을 양각한 4각형의 부조판을 붙여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아르누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1층 창은 반원 아치형, 2층 창은 평 아치형으로 각각 고창을 둔 철재 오르내리창을 설치하였는데, 창과 출입문의 인방에는 장식용 타일, 1층 창과 현관 포치 위에는 4각형 장식판으로 꾸몄다. 2층의 창 위에는 치아형(Dentil) 장식물을 붙여 수평 돌림띠처럼 구성하였다.

파라펫 위에는 세로로 긴 3각뿔 모양의 장식물을 일정한 간격으로 붙이고, 그 사이에 특수한 장식타일을 붙여 율동감과 함께 수평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내부는 각 실과 계단, 복도의 바닥이 모두 인조석 물갈기와 타일로 마감되었고, 1층 영업장은 콘크리트 위에 장마루 판을 깔았다. 벽은 징두리벽의 타일이고 상부벽은 회반죽 마감이며, 천장은 2방향 장선 바닥판 구조로 구성하여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난방은 라디에이터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중앙집중식 증기난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건물은 슬래브지붕의 난간벽과 처마부의 수평 돌림띠, 창의 인방부 등을 타일로 섬세하게 장식하는 등 전 시기의 건물들과는 달리 정면부의 장식이 비교적 단순해지고, 지붕을 슬래브로 처리하여 수평선을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는 일제가 건축하기 시작한 근대건축물이 유럽의 근대건축운동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말 아르누보(Art Nouveau), 제체시온(sezession) 등의 근대건축운동의 영향으로 과거 양식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했으며, 새로운 양식과 장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때의 건축은 합목적성에 따른 기능주의로의 경향을 나타내면서 산업의 발전과 새로운 사회의 수요에 따라 합리주의 건축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기능주의 건축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국제정세가 안정되어 과학의 진보와 공업의 발전으로 합리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는 1910년대의 실험적 단계에서 벗어나 건축양식의 다양성을 보여주었으나, 기능주의적 특성과 국제주의적 범세계성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디자인과 기술면에 있어서의 실험은 넓은 지역에까지 파급되어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국제적 건축으로 국가들 간의 문화적인 격차를 급격히 축소시켰다. 그러나 이 실험적 성과는 초기단계에서 크게 호평을 얻어 그대로의 형태로 도입되는 듯했으나, 전통의 재평가와 지역성·풍토성 등에 대한 반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디자인의 다양성을 창출하려는 욕구가 일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의 일본은 유럽 근대상업건축의 영향을 받았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인하여 자재의 부족과 기술의 제약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당시의 건물 구조와 양식은 대부분 벽돌조 조적식 구조로 식민지에 대한 권위의 상징으로 고전주의 또는 르네상스풍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건축되고 있었다.

대구의 상업건축은 일제가 1903년 경부선 철도부설공사를 진행하고,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대구읍성이 철거되기 시작하여 그 자리에 도로가 신설되는 신도시계획에 따라 전개되었다. 대구역을 중심으로 남북에 중앙로를 주축으로 하고, 내부에는 종로와 동문로, 서문로가 개설되어 부축을 이루고 외곽 읍성자리에 동·서·남·북성로가 개설되었다.

특히 일본은 주인 없는 읍성 자리에 일본 거류민에게 상업건축물을 짓게 하여 대구의 중심상권을 탈취하였다. 이 건물은 중심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서문로와 종로의 결절점에 위치하여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면서 조선 상인들을 수탈하는 거점이 되었다.

광복 후 공교롭게도 한국산업은행으로 재탄생되면서 한국 근대화에도 기여하였다.

공동취재= 이중우 계명대 명예교수,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참고자료= 대구의 고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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