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양경관농업단지에 장미터널이 길게 놓여 있다. 주변의 너른 화단에서는 노랑, 분홍, 빨강 등 색색의 장미들이 피어나고 있다.

새어 들어온 빛으로 터널 안은 더 없이 몽환적이다. 하양경관농업단지의 여름 장미터널은 포토 스팟으로 이름나 있다.
까맣게 감은 눈 속이 갑자기 환해진다.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부신 세상이 천천히 지나간다. 초록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지하철 연장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지상으로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도시철도 1호선 안심역에서 하양역까지는 지상철이고 선로는 대구선과 나란하다. 창밖을 보며 천천히 달리니 오랜만에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느낌이다. 낯선 부호역에서 내린다. 역 일대가 하양읍 부호리다. 호산대와 경일대가 들어서 있는 마을이다. 가방을 둘러매고 우루루 내리는 학생들의 꽁무니를 따라간다. 그들은 역사 문 바로 앞 횡단보도에 멈추었고, 나는 휙 돌아 선로 아래를 지나 강변으로 간다.

터널과 터널 사이 꽃길도 즐거이 순서를 기다리는 포토 스팟이다.
◆ 하양경관농업단지
강렬한 빨강이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강변에 장미터널이 길게 놓여 있다. 장미꽃은 절정이기도 하고, 꽃잎을 떨구기도 했고, 이제 피어나는 중이기도 하다. 새어 들어온 빛으로 터널 안은 더 없이 몽환적이다. 천천히, 그러나 뒤따르는 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총총 전진하며 이 신비로운 꽃빛에 입을 대고는 그냥 들어 마신다. 애기엄마들, 모녀, 중년의 여인들, 이국의 아가씨들, 젊은 커플, 중년의 부부, 점심시간을 틈타 나온 인근 학교의 교직원들 등 수 많은 사람들이 꽃을 누리고 꽃 속을 누빈다. 터널과 터널 사이 꽃길도 즐거이 순서를 기다리는 포토 스팟이다. 옆에는 가느다란 줄기가 열심히 자라고 있는 장미터널도 있고, 주변의 너른 화단에서는 노랑, 분홍, 빨강 등 색색의 장미들이 피어나고 있다. 길바닥에 여성용 핸드백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꽃을 보느라, 사진을 찍느라, 가방 따위는 잊어버린 듯하다. 너무 좋다, 너무 좋다는 외침을 두 번 들었다. 숨길 줄 모르는 사람들의 똑같고 무의식적인 감탄에 할머니처럼 흐뭇해진다. 정원은 공간과 즐거움의 합성어라 한다.

대부잠수교를 건넌다. 멀리 선로의 교각이 선명하고 가까운 하류에는 경산시 남산면과 하양읍을 잇는 국도대체우회도가 건설되고 있다.

대부잠수교 건너 강둑 위 자전거 길에는 금계국과 붉은 장미가 피어 있다. 왼쪽 아래 길이 환상리 묘목단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다.
이곳은 하양읍행정복지센터가 지난 2015년 금호강변에 조성한 꽃밭이다. 전체 5만2천35㎡ 규모로 정식 이름은 '하양경관농업단지'다. 2005년 경 부터 유채꽃과 메밀꽃을 심으면서 오랫동안 하양유채꽃단지라 불리기도 했다. 간결한 안내판에는 현재 위치, 포토존, 화장실, 벤치 등이 표시되어 있지만 꽃의 종류를 알 만한 화단의 이름은 따로 없다. 지나온 해를 되짚어 보면 봄에는 유채꽃과 싱그러운 청보리, 초여름에는 꽃양귀비, 한여름에는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칸나와 해바라기 또는 접시꽃, 가을은 코스모스였다. 매해, 매 계절의 조건과 사정에 따라 꽃의 종류는 유동적인 것 같다. 지난해 꽃양귀비가 흐드러졌던 화원에는 오늘 어린 묘목들이 줄지어 식재되어 있고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아직 초록의 풀잎만 성성한 이곳에서 무슨 꽃이 피어날까. 화원 안쪽 벤치에 누군가 낮잠에 빠져 있다. 툭 떨궈진 팔에 고단함이 묻어난다.
가을 코스모스를 기대할 만한 공지에는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다. 둥그런 그늘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고,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기도 하고, 아예 드러누운 이도 있다. 땡볕의 대낮도 수목의 그림자도 재화로 여기는 부유한 사람들이다. 농어촌 경관의 보전, 관리에 대한 법적 근거를 본격적으로 마련한 것은 2004년이다. 삶의 질 향상 및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통해서다. 2006년에는 농어촌 경관 관련 각종 시책의 추진방안을 마련했고 2010년에는 '농어촌 환경 경관 개선'을 '삶의 질 기본계획' 중 하나로 제시했다. 경관을 잘 가꾸는 것이 농어촌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아름다움이 삶의 질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일제히 동쪽으로 얼굴을 들이민 갈대밭 너머 먼 장미터널이 선명하다. 그 위로 부호역 역사의 아치 지붕이 매끈한 광채를 낸다.

하양교를 건넌다. 다리 아래 강변은 이미 금계국 천지지만 날이 갈수록 노란빛은 더욱 짙고 촘촘해질 것이다.
◆ 대부잠수교에서 하양교까지, 금호강변길
하양경관농업단지 가운데를 달리는 화성로는 대부잠수교와 연결되어 있다. 대부잠수교는 이곳 부호리와 강 건너 하양읍 대조리를 연결하고, 하양IC에서 경산종묘산업특구인 환상리 묘목단지와 하양읍(호산대, 경일대, 대구가톨릭대 방면)을 잇는 지름길 역할을 한다. 왕복2차로에 난간도 없고 비가 많이 오면 잠기는 다리지만 하루 통행량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부잠수교를 건넌다. 아주 오래전부터 열 번쯤은 건넌듯한데,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운전자도 보행자도 모두가 조심한다. 다리 끝 강변에는 청보랏빛 수레국화가 만발했고 둑 위 자전거 길에는 금계국과 붉은 장미가 피어 있다. 하양교 방향으로 걸어간다. 둑 아래는 대부분 들이고, 또 그중 대부분은 묘목 단지다. 경산은 전국 묘목 생산량의 7할을 책임지는 국내 종묘산업의 메카다. 경산 종묘산업은 사과 묘목을 주종으로 각종 유실수를 비롯해 장미 묘목이 주류를 이루는데 금호강 일대인 하양읍과 진량읍, 와촌면 등을 중심으로 생산된다. 특히 대조리와 환상리에서 생산된 장미 묘목은 전국 거래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경산은 경관단지를 가꾸는데 최고의 요건을 가진 셈이다.
부기천이 금호강으로 흘러든다. 진량읍 부기마을의 들판을 가로질러온 물길이다. 이즈음부터 부기리가 시작된다. 예부터 들이 넓어 부자가 많다고 '부태'라고 불렸는데 이후 한자로 '부기(富基)'가 되었다고 한다. 합수부의 둑 아래에 큼지막한 베이커리 카페가 있다. 건물이 멋있어서 한 바퀴 휘 돌아 관망한다. 차들이 잔뜩 주차되어 있고 반투명한 창으로 보이는 내부에는 빈 테이블이 드물다. 뒤쪽의 부기천변에는 애견카페가 있고, 둑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또 다른 이름난 카페가 이국적인 지붕을 쓰고 나타난다. 금호강변에 꽃밭을 만들고 부호역 등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주변으로 카페와 빵집,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일제히 동쪽으로 얼굴을 들이민 갈대밭 너머 먼 장미터널이 선명하다. 그 위로 부호역 역사의 아치 지붕이 매끈한 광채를 낸다.

강 건너 둑 위로 보이는 건물들이 새로 생겨난 카페들이다. 금호강변에 꽃밭을 만들고 부호역 등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주변으로 카페와 빵집,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도시철도와 대구선 선로 교각 아래를 지나면 머지않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장미터널이 보인다. 강렬한 빨강이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둑길에서 강변 산책길로 내려선다. 이 계절 하양의 금호강변에는 금계국이 한창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꽃망울이 더 많다. 소리쟁이도 무성하고 보랏빛 갈퀴나물도 가득하다. 요상한 나무에 잠시 멈칫한다. 잎 모양은 아카시아랑 똑 닮았는데 그 사이 길쭉하고 시커멓게 꿈틀거리며 뻗쳐 나와 있다. 열심히 알아보니 '쪽제비싸리'라는데 벌들이 아주 좋아하는 꽃이란다. 한 아주머니가 통화를 하며 걸으신다. "좀 걸을라고 나왔는데 너무 덥네." 강둑을 걷던 청년이 저만치 멀어진다. 하양교를 건넌다. 경산시 진량읍과 하양읍을 연결하는 다리다. 하양교 아래 강변은 이미 금계국 천지지만 날이 갈수록 노란빛은 더욱 짙고 촘촘해질 것이다. 화물열차가 대구로 간다. 금호강에 백로가 난다. 조그맣게 보이는 이름 모를 물새들은 수면위에 선적으로 드러나 있는 강돌에 정물처럼 서 있다. 무궁화호 열차가 포항으로 간다. 짐자전거를 탄 어르신이 똥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가신다. 지하철과 대구선 선로 교각 아래로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땡볕 속 강변 산책 중에 만난 반가운 그늘이지만 조금은 무섭다. 머지않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장미터널이 보인다. 그 사이 꽃도 사람도 더욱 부유해진 듯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도시철도를 이용할 경우 1호선 부호역에 내리면 된다. 장미꽃밭까지 3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경부고속도로 경산IC에 내리면 톨게이트 앞에서 우회전해 약 1.3km 직진, 환상리 이정표가 나오면 우회전해 직진한다. 환상리 묘목단지를 가로질러 대부잠수교를 건너면 된다. 주차장은 넓고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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