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등지고…신천 바라보고… “자연순응적 배산임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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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서 자연지세를 따라서 만들어진 도로를 오르면 경북도 본청을 만나게 된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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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로 표현한 수평적 처마에 돌출된 서까래가 돋보이는 경북도 본청. |
영남일보 창간 70년을 맞아 기획한 ‘대구의 역사가 녹아있는 근대건축-대구의 근대건축물 10선’의 마지막 순서로 소개되는 경북도청은 1965년 대구의 건축가와 건축기술로 설계되고 지어진 후기 근대건축에 속한다. 나라의 존망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쳐온 한국의 건축사에서 우리만의 건축 흐름과 맥락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수 있다. 이 땅의 근대건축은 우리의 손길보다 외국선교사, 일제, 미군정의 기술과 영향력, 또한 그들에게서 배우고 경험한 기술자들과 몇몇 1세대 건축가들에 의해 탄생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귀중한 역사가 녹아있기에 뛰어난 가치를 지닌 건축유산들이다.
자연환경과 조화 이뤄낸 정면 대칭구조
도심 중앙로서 가장 높은 곳에 터 잡아
北출신 현대건축 1세대 정경운이 설계
수평적 처마에 콘크리트로 서까래 표현
돌출된 발코니는 건물의 수평요소 강조
현관·계단·캐노피 등엔 근대기법 도입
◆경상감영에서부터 이어져온 역사
현대의 도청과 같은 행정기능은 조선시대에는 지방 행정의 8도제 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경상감영(慶尙監營)이 담당했다. 조선 초기에 경주에 있던 감영은 상주,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을 거쳐 1601년(선조 34)에 최종적으로 대구에 정착했다.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이 이뤄진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되며 56년간은 포정동(현 경상감영공원 부지)에 있었다.
1965년 현 청사가 준공됐으며 1966년 4월1일 경북도청은 포정동에서 지금의 산격동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 건립 시기로 보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보다 3년 빨리 건립됐다. 당시로선 ‘근대화의 상징’을 표방하는 첨단 공공시설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경북도의 위상도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년 2월이면 산격동 도청은 안동 새 청사로 이전한다. 하지만 현 청사는 근대 건축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경북도청은 배치의 기법과 입면의 형태에서 한국 전통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건립 당시의 시대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북도청이 건립된 60년대는 3공화국 탄생 이후 국토재건, 경제부흥, 조국근대화가 추진된 시기이며 일제 식민지교육 시대를 지나서 소수의 국내 건축교육을 받은 세대와 유학파 건축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정치적 공백과 격동기를 지나 건축법, 건축사제도 등 새로운 기틀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서구에서는 탈근대 건축의 시기로 레이트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태동하고 있었다.
설계자 정경운(1922~2005)은 북한 출신으로 대구 현대건축의 1세대 건축가이다. 한강이남에서 최초로 건축과가 개설된 청구대학의 교수로 출발,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건축 작품으로는 영남대학 마스터플랜 및 중앙도서관 타워, 영남이공대학 도서관(옛 대구대학 중앙도서관)과 제일모직 대구공장, 중앙로 옛 대구은행 본점, 옛 국세청건물(현 노보텔 자리) 등의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일부 캠퍼스 건축 이외는 철거됐거나 개조돼 원형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어 아쉬움을 남긴다.
◆위치 선정과 배치
지금의 대구 도시구조는 동과 서를 연결하는 달구벌대로가 도시의 중심축이지만, 그 당시에는 대구 도심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앙대로가 중심축이었고 신천을 건너 그 정점에 청사를 지었다. 도청사의 부지는 번화가인 도심의 중앙로에서 도청교로 연결되는 축 선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동산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향후 도시계획의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았을 시기에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의 성곽 도시 스케일을 벗어나서 새로운 관공서 터를 찾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당시 부지 선정을 할 때 풍수지리학적 의미를 중요시했다고 한다. 도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 일대는 잡풀과 수목으로 우거진 공동묘지 터였다. 이처럼 버려진 땅에 도청사가 자리잡게 된 것은 육관도사로 잘 알려진 손석우 선생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도시적 스케일로 보면 앞산(안산)을 바라보고 멀리 팔공산(배산)을 등지고 신천(임수) 물길을 안고 있으며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지형이다. 지금 도청사 주변으로는 도교육청, 의회, 경찰청, 소방본부, 선관위, 환경연구원, 대구실내체육관 등의 관공서 공공시설들이 자리해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지리적 기능적 상황과 잘 부합되는 관공서의 입지로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이전의 변화 없이 한 장소에서 변화하는 기능성을 탄력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청사의 좋은 위치 선정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정문에 들어서서 직선도로가 아닌 자연지세를 따라서 여유롭게 돌아오르다보면 청사 앞마당과 가로로 긴 5층 건물을 만나게 된다. 관공서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문, 광장, 건물의 수직적 자리배치와 건물을 바로 맞닥뜨리게 되는 정면성의 경직된 모습이 아니다.
60년대 당시의 정서와 사회적 분위기를 예상해 보면 언덕과 나무를 밀어붙이고 광장과 공공건물의 위압을 과시하던 개발의 시대였다. 직선도로 축에서 벗어나 산사에 오르듯 엇비켜 진입하는 자연 순응적 배치를 관공서 건축에 실천한 예는 드문 경우라 하겠다. 한국의 전통적 정서에 유연하게 자리한 건축적 배치성이 도청사 건축의 오랜 수명과 철거하지 않고 보존해야 한다는 그 가치를 높인 것이다.
◆건축적 특징
도청사의 건축적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미적 요소를 콘크리트 건축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정면을 구성하고 있는 조형적 요소는 수평적 처마와 음영의 실루엣으로 강조되고 있는 촘촘한 서까래의 돌출 디자인이다. 그 서까래 형태의 실루엣과 처마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는 발코니의 돌출이다. 발코니는 5층 건물의 안정된 수평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건축 구법(構法)은 1920년대 이후 서구에서 시작된 콘크리트 공법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조적식 건축구법에서 콘크리크 라멘공법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공공건축물이 목조 슬레이트 구조였던 데서 벗어나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보급되어 대규모 구조적 건축이 가능해진 시기였다. 후일 1991년 증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건물은 주위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정면 대칭구조로 세워졌고, 중앙현관·계단·현관캐노피 등 시설에는 콘크리트의 본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근대 건축기법이 도입됐다.
건축비평가들은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 단게 겐조가 설계한 가가와현 청사(1956~58) 입면 디자인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근대의 시기에 건축교육과 정보 기술 습득의 대부분은 일본을 통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 일본식 이미지, 디자인 표절 논란이 종종 있어왔다.
◆과거의 건축은 문화의 콘텐츠
지역에서 근대건축의 재활용 사례로 대구시민회관, 연초제조창(예술창작발전소), 옛 상업은행(대구문학관, 향촌문화관), 옛 산업은행(근대역사관)이 있다.
국내 옛 도청사를 건축 재생한 경우는 광주 전남도청사가 있다. 국비 5조8천억원이 투입되어 ‘국립 아시아문화의 전당’으로 지난 9월 일부 시설이 개관됐다. 1932년 지어져 6·25전쟁 때 임시 중앙청이었던 대전 충남도청사는 ‘대전근현대사진전시관’과 ‘대전시민대학’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영화 ‘변호인’ 촬영장소로 알려져 있다.
경북도청의 안동 이전으로 현 도청사 부지는 후적지 개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동안의 논의과정에서는 자연사박물관, 창조경제타운, 대구시청 이전지 등이 거론되고 있다. 후적지에 어떠한 새 기능 공간이 조성되더라도 기존 건축의 본질과 원형의 틀을 훼손하지 않고 잘 유지하면서 새로운 미래의 공간으로 재창조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취재= 최상대 대구건축아카데미 운영위원장,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경북도청
주소= 대구시 북구 산격동 1443-5
건립연도= 1965년
규모=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2만1천329㎡
<건축물 정보 대구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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