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을 작업실로 쓰는 송재학의 신작시집 ‘검은색’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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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26   |  발행일 2015-11-26 제23면   |  수정 2015-11-26
“햇빛 한줌 없는 地下서 난 수년간 어둠을 관찰했다”
나무의 대화…탁본한 달…기발한 상상·언어미학 살려
지하실을 작업실로 쓰는 송재학의 신작시집 ‘검은색’
‘검은색’에 대한 단상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송재학 시인과 신작시집. <송재학 제공>

송재학 시인의 작업실은 땅 아래에 있다. 어둠과 어둠이 서로를 물고 있는 지하공간, 햇빛 한 줌 없는 작업실은 시인의 내면 깊숙한 곳과 맞닿아 있다.

시인은 “내가 작업실로 지하실을 골랐던 건 어둠 때문이었다. 몇 년간 지하생활자의 생을 통해 나는 어둠을 관찰하고 음미하고 어둠에 스스로를 방기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송 시인의 신작시집 ‘검은색’(문학과지성사)은 시인이 어둠의 공간에서 수년을 보낸 끝에 얻은 성찰과 사유의 산물이다. 검은색은 세상의 모든 색을 다 받아들이되 스스로는 아무것도 내보내지 않는 존재가 마침내 띠는 색, 결국 색이 아닌 색이다.

‘사람의 말과 나무의 말은 다르다 사람의 말이 공중에 번지는 소리의 양각이라면 나무의 말은 소리를 흡입하여 소리의 음각을 만든다 공중의 소리 일부를 흡입하면서 만들어낸 펀칭 카드를 통한 나무의 대화법은 고요의 음역(音域)이다 성대가 없는 나무들에게 잎과 수피의 자잘한 구멍을 통한 소리의 들숨이야말로 맞춤한 점자법이라면 나이테는 소리에 대한 지문이겠다.’(‘나무의 대화록’ 일부)

고요한 숲 속, 시인은 조용히 숲 속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나뭇잎들이 몸을 부비고, 혹은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침내 시인은 나무들이 잎과 수피의 자잘한 구멍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하실을 작업실로 쓰는 송재학의 신작시집 ‘검은색’

그뿐만 아니라 하늘에 걸린 달을 탁본하는 내용을 담은 ‘습탁’ ‘건탁’이라는 시에서도 시인의 기발한 상상과 감각적인 언어미학은 살아난다.

‘전날 밤은 흐려서 습탁이 맞춤이었다 달은 이미 흥건히 젖었다 권층운의 아귀를 슬며시 들추니 젖는다는 것은 달의 일상이다 구름의 일손을 빌려 달빛 몽리면적까지 화선지를 발랐다 달이 그새 참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한 마장 훌쩍 미끄러진다’(‘습탁’의 일부)

‘달 위에 미농지 덮고 탁본 묵을 문지르자 수피가 거친 나무부터 도드라졌다 달의 미열도 덩달아 솟을새김이다 달의 쇄골 가지에서 졸던 새들은 잠을 뒤척인다 미농지를 흔들면 어린 새들조차 달로 되돌아갈 것이다 다시 미농지를 문지르자 수면이 음각으로 번진다’(‘건탁’의 일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들 시에 대해 “달을 탁본한다는 것부터가 실로 기발한 발상인데, 탁본의 과정을 이토록 정교하게 설명해놓았으니 정말로 달을 탁본하는 데 성공했으리라 믿고 싶어질 지경”이라고 밝혔다.

신 평론가는 “(송재학의 시는) 풍경을 텍스트처럼 해석한다. 비평가가 특정한 작품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면서 그만의 작품 하나를 가지듯, 송재학은 풍경이라는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것을 가지는 듯하다”고 평했다.

송 시인은 1955년 영천에서 태어나 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얼음시집’ ‘푸른빛과 싸우다’ ‘진흙얼굴’ 등 8권의 시집을 펴냈다. 이번 시집 발간을 기념하며 오랜 문우인 김재진 시인과 함께 오는 28일 오후 3시 대구시 중구 교보문고에서 ‘독자를 위한 문학한담’을 가진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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