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의 一言一思] 대통령 연설문 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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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8   |  발행일 2016-10-28 제22면   |  수정 2016-10-28
[김영수의 一言一思] 대통령 연설문 독회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통령이 고객인 연설문
여럿이 함께 읽고 또 읽어
소통을 해야 정치가 살고
삿된 사람 끼일 틈 없어야
국정이 방향 잃지 않는다

청와대에 처음 출근한 것은 2010년 설을 지나 2월 중순경이었다. 당시 정용화 연설기록비서관이 지방선거에 출마하며 사직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한 2013년 2월까지 필자는 꼬박 3년간 대통령 연설을 담당했다. 출근해 보니 당장 3·1절 연설이 코앞에 있었다. 대통령 축사를 보내야 할 사관학교 졸업식들도 화급했다. 격주로 하는 라디오연설도 있었다. 그때부터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스피치라이터는 청와대에서도 3D업종의 하나로 불린다. 먼저 마감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안 좋은 직업이 마감 있는 일이다. 목숨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30분 안에 7분짜리 연설문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 일정은 절대적이라 ‘지연’이란 단어가 없다. 다음으로 숙제검사를 받아야 한다. 한 번으로 안 끝난다. 큰 연설은 족히 수십 번은 고쳐 쓴다. 머리에 열이 나 모발이 다량 빠지고 백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된다. 필자 머리도 다 하얘졌다. 잘하면 본전, 못하면 폭풍이 분다.

마지막으로 고객이 대통령이다. 필자 경험으로 보면, 보통 사람은 대통령 앞에만 가도 오금이 저린다. 평소 술술 나오던 말도 갑자기 더듬거린다. 그런 대통령을 거의 매일 보아야 한다. 아무리 편하게 대해줘도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청와대 비서관동에서 본관 집무실로 올라가는 길에 하늘채 정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때 만든 것이다. 야생화도 심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수련과 물풀을 띄웠다. 키 큰 적송은 북악산을 쳐다보며 무심히 서 있다. 청와대 하늘이 가장 높고 푸른 곳이다. 본관에 올라가다 그곳에 잠시 멈춰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 하늘채 정원은 정말 있을 곳에 있는 정원이다. 그걸 만든 이는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모든 대통령이 그렇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유독 연설문에 애정이 많았다. 초고가 완성될 즈음이면 대통령이 부른다. 관련 비서관, 수석, 장관들도 함께 부른다. 행정관, 정부 국장, 또는 민간인이 참석할 때도 있다. 다 함께 모여 초고를 읽는 ‘독회’를 한다. 연설비서관이 낭독하면 아무나 자유롭게 질문도 하고, 지적도 하고, 의견을 낸다. 대통령 마음이 흡족하지 않으면 어, 이런 건 젊은 사람들 생각이 중요해. 그래, 당신들 생각은 어때 하고 행정관이나 국장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연중 가장 큰 연설인 8·15 때는 대통령과 이런 독회를 최소한 10회 이상 한다.

연설비서관 입장에서 가장 미운 건 의견이 많은 사람이다. 그게 다 일이기 때문이다. 이동우 기획관리실장, 김상협 녹색성장기획관이 그런 분들이었다. 가끔 대통령 몰래 눈을 흘긴다. 좀 봐 주세요란 애원이다. 그래도 막무가내인 분들이 있다. 대통령이 막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더 신이 났다.

독회 때면 의전비서관도 속이 탄다. 대통령에게 가장 부족한 자원은 시간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독회에 시간을 물 쓰듯 소비한다. 대통령을 기다리는 일은 산처럼 많고, 사람도 줄을 서 있다. 의전비서관은 시간과 싸우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왁자하니 웃고 떠들며 독회를 하고 있으니 야속할 따름이다. 김창범 서울시 국제관계대사는 4년 이상 의전비서관을 했다. 그의 가슴은 하얗게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황금 같은 시간이다. 관련 업무를 놓고 대통령과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온다. 대통령도 이 기회에 공부도 하고, 당신 생각도 말한다. 당연히 독회가 길어질 때가 많다. 그러면 커피 브레이크를 하며 머리를 식힌다. 밥때가 되면 밥을 시켜 먹으며 계속 이야기를 나눈다. 샌드위치를 먹기도 한다. 밤 10시가 넘을 때도 있다. 독회가 끝나고 어두워진 하늘채 길을 내려올 때면 다들 기분이 홀가분하다. 오직 한 사람, 연설비서관만 마음이 무겁다. 이제부터 연설문을 다듬어 완성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한테는 뭐라고 전화해야 하나. 하지만 소통을 해야 정치가 산다. 삿된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고, 국정이 방향을 잃지 않는다. 연설비서관이 아무리 힘들어도 대통령이 독회를 자주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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