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질서를 향해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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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16   |  발행일 2016-11-16 제39면   |  수정 2016-11-16
[박재일 칼럼] 대한민국, 새로운 정치질서를 향해

박근혜 대통령은 말이 많은 정치인은 아니다. 그것이 전술이든 약점 감추기든 달변과는 거리가 멀다. 짧은 단어가 주축이다. 이른바 신비주의 정치를 구사한다 할까. 그것은 종종 소통 부재란 비판을 받지만, 정치인의 덕목으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2012년 가을. 대통령 후보 박근혜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외부에서 온 유력 인사들이 후보를 비판하고 흔들기 시작했다. 여의도에서 만난 새누리당 중견 정치인에게 물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답 대신 그는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리고 덧붙였다. “그 사람들 아무리 그래 봐. 따로 만나 ‘도와주세요’란 한마디 들으면 아무 소리 않고 ‘네’ 그럴 거라고. 희한하지, 밖에서는 큰 소리 치는데 만나기만 하면 작아지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은 신비주의와 함께 일종의 카리스마를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것만으로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시 이때쯤 김재원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박근혜 대통령 후보 대변인에 임명됐고, 바로 그날 저녁 낙마한 ‘사건’이 있었다. 박근혜 후보가 출마한 명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전 정무수석은 대뜸 “박 후보께서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해 버렸다. 난리가 났다. 대통령 후보가 아버지 명예를 위해 출마했다니. 안 그래도 반대 진영으로부터 ‘독재자의 딸’이란 딱지가 붙었는데. 김 전 정무수석은 다음날 바로 해임됐다. 너무 앞서간 말이었을까.

사실 ‘대통령 박근혜’는 그 혼자만의 성취는 아니다. 그 이전 아버지 박정희 시대와 함께 얽힌 정치적 산물이다. 그 시대에 대한 존중이 과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선거 구도를 좁혀봐도 ‘노무현의 비서실장 문재인’보다는 ‘박정희 딸 박근혜’가 훨씬 감성적이다. 개인적으로 박근혜가 된다면 대한민국 근대 정치사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봤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대미문의 정치실험에 들어섰다. 우리 앞에 날마다 다가오는 일들은 하나같이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기 쉽지 않은 사상 초유의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역대급 100만 시민이 촛불시위를 하고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시민의‘ 헌법적 저항권’에 근거한 법적 실력행사다. 현직 대통령이 검찰의 직접 조사를 받는 것도, 또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혐의를 방어하기 위해 민간 변호사를 선임한 것도 처음이다. 이것으로 그칠 것 같지도 않다. 대통령은 이미 국회를 찾아가 총리를 선임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하야에서부터 책임총리, 탄핵과 대통령직 정지, 여기다 다음 대선을 언제 어떻게 치를 것인지를 놓고 온갖 경우의 수까지 등장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랄까. 우리는 지금 새로운 대한민국 정치질서를 구축해야 할 과제에 직면했다. 정치 실험이다. 흡사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정치질서의 기원’에서 던진 정치적 진화에 대한 물음이다. 민주주의 이념 논쟁의 역사는 끝났지만, 한편 어떤 정치를 만들고 가꿔나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 앞의 도전이다.

모든 초유의 것들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 하나 하나는 민주주의의 가지가 될 수도 있고, 독재와 나쁜 선례의 잉태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갈수도, 옆으로 갈수도, 행여 뒤로 돌아설 수도 있다. 조만간 승복한다는 쪽과 그럴 수 없다는 두 쪽으로 갈릴 수도 있다. 대통령의 하야든 2선후퇴든 그 어느 쪽도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퇴보가 돼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정치는 우생(優生)을 따르는 생물처럼 진화해야 한다. 이런 저런 또다른 권력 앞에 우리가 작아진다면, 행여 다가올 권력에 미리 작아진다면 우리는 또 한번 어처구니없는 권력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다. 2차대전 후 민주화 산업화를 명실공히 동시에 성취했다는 대한민국을 세계가 보고 있다. 어떤 길을 가든 ‘21세기 민주주의의 선례’가 될 것이다.

편집국 부국장 겸 정치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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