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 부결…렌치 총리, 사퇴 선언

  • 입력 2016-12-05 00:00  |  수정 2016-12-05 11:38
伊방송 출구조사 결과…伊, 英美 이어 포퓰리즘 도미노 3번째 희생양
伊극우 정당 득세 가능성…탈 EU '이탈렉시트' 가능성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추진해 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예상보다 큰 차이로 부결됐다. 렌치 총리는 이에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를 선언했다. 2014년 2월 역사상 최연소총리로 취임한 지 2년 9개월 만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내년 상반기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으로 보이며, EU 탈퇴를 선호하는 극우 야당 등이 득세할 경우 이탈리아판 브렉시트(이탈렉시트·Italexit)가 실현될 가능성도 높다.


 4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치러진 개헌 국민투표 이후 공영방송 RAI와 LA7 등 이탈리아 방송사가 발표한 출구조사 결과 반대가 54∼59%로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렌치 총리는 자정을 넘긴 시간 총리궁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결 진영이 "놀랍도록 명백한" 승리를 거뒀다며 패배를 인정하고, "전면적 책임을 지겠다. 정부에서의 내 경력은 여기서 끝난다"며 사퇴를 선언했다.


 현행 헌법은 상·하원에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지만, 개헌안은 상원의원 수를 줄이고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부결은 렌치 총리가 제시한 정치 개혁 명분이 포퓰리즘과 극우 성향의 야당들이 기성 정치인에 대한 심판론을 내세우며 좌절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반(反) 이민·반 세계화 정서를 자양분으로 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이은 포퓰리즘의 승리 사례로 평가된다. 
 
 렌치 총리는 2007년을 정점으로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이탈리아의 경제 침체가 정치 불안정과 관료제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회생이 어렵다고 보고 개헌안을 마련했다.


 이 개헌안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통과했지만, 최종 관문인 국민투표에서 가로막혔다.


 렌치 정부가 제시한 개헌안은 상원의원을 현행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입법권과 정부 불신임권 등 핵심 권한을 없애는 등 상원의 대폭 축소와 함께 중앙 정부 권한 강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양원제를 채택한 나라로는 유일하게 상원과 하원이 입법 거부권과 정부 불신임권 등 동등한 권한을 지닌 이탈리아의 정치 체계는 양원이 정부의 입법안을 주고 받으며 입법을 지연하거나 차단해온 탓에 정치 불안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렌치 총리는 정치 체계를 간소화하고 비용을 줄임으로써 2차 대전 후 공화정이 들어선 이래 70년 동안 63번이나 정부가 바뀐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해소하고, 정치안정을 바탕으로 침체된 이탈리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명분으로 개헌을 추진해 왔다.
 이탈리아는 2009년 불거진 남유럽 재정위기 이후 경제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으며 작년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0년 전인 1997년과 엇비슷한 3만3천 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에 대해 집권 민주당의 일부 거물급 인사를 비롯한 비판론자들은 상원의 축소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손상시킴으로써 민주주의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또 총리에게 너무 큰 권력을 쥐여 줘 이탈리아에 파시즘의 악몽을 가져온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를 출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부가 주장하듯 비용 감소의 효과도 크지 않고 오히려 정치 체계에 혼란만 일으킬 것이라며 반대했다.


 특히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을 필두로 한 야당들은 렌치 총리가 투표 결과를 자신의 거취와 연결짓자 국민투표를 더딘 경제 회복, 고착화된 실업난, 난민 대량 유입 등 렌치 정부의 실정을 심판하는 투표로 몰고 가면서 국민투표의 실익에 대한 국민적 논의는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렸다.


 렌치 총리의 사퇴로 당분간 이탈리아는 정치적 혼돈과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이탈리아는 2018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내년 상반기로 앞당겨 실시할 것으로 관측된다. 선거를 치를 때까지는 과도 정부가 꾸려져 총선을 대비한 선거법 개정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과도 정부의 수장을 맡을 렌치 총리 후임으로는 현재 렌치 내각에서 재무 장관을 맡고 있는 카를로 피에르 파도안 장관이나 피에트로 그라소 상원의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또 이탈리아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하면서 취약한 이탈리아 은행에 직격탄으로 작용할 전망이며, 이탈리아를 넘어 유로존과 세계 경제에도 단기 충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민투표 부결로 이탈리아 정치 지형의 격변도 불가피해졌다.


 국민투표에서 예상보다 큰 격차로 패할 경우 민주당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는 반면, 개헌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 포퓰리즘 성향의 제1야당 오성운동과 반(反)이민·반 유럽연합(EU)을 주장하는 극우 북부리그(NL)의 영향력은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탈리아 현행 선거법 상으로는 내년에 치러질 조기 선거를 통해 유로존(유로화사용 19개국)에 회의적인 오성운동이 집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EU의 우려도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성운동이 유로존 3위 경제 대국인 이탈리아의 유로존 잔류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탈리아가 유로존을 떠나는 이탈렉시트(Italexit)가 현실화하면 EU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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