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만 끓일 줄 알아도 거뜬…“남자들이여, 김장에 뛰어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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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09   |  발행일 2016-12-09 제40면   |  수정 2016-12-09
[이정혁의 남자의 취미] 김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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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양념을 버무려서(위쪽) 아버지와 둘이 마주 앉아 김치를 담그는 모습.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훈훈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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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겉절이와 수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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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요리 즐기며 엄마솜씨 흉내내다
40년만에 고무장갑 낀 아버지와 함께
드디어 ‘넘을 수 없는 벽’ 김장에 도전

절인 배추 구입해 절반으로 줄어든 일
양념 버무려 배추 속 채우는 쉬운 과정
아들들까지 남자 3代가 이룬 가정혁명


살다 보면 종종 육체와 정신이 극단의 경계에 서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 발만 미끄러지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 이럴 때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맛집을 찾는다. 다들 그동안 익숙한 각각의 치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럴 때가 있고, 그렇게 심신이 피폐해진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엄마가 해주는 밥이다.

엄마가 해주는 집밥의 배후에 고향의 맛으로 대변되는 MSG가 일부 도사리고 있다는 의혹은 물증으로 확인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어떤 화학조미료도 흉내내지 못하는 엄마 특유의 손맛은 분명 모든 자식에게 향수가 된다. 멸치에 호박 대충 썰어 넣고 10여분 만에 뚝딱 끓여내는 된장찌개가 엄마의 손을 거쳐 나오면, 웬만한 궁중요리가 울고 갈 수준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엄마의 솜씨를 흉내낼 때가 있다. 어깨 너머로 훔쳐보거나 대놓고 물어봐서 적어 오거나, 아무튼 며느리한테는 안 가르쳐줄지도 모르는 엄마의 비법을 몇 개 전수했다. 이제 어지간한 국이나 찌개는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아구찜이나 갈비찜 등은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딱 하나,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김치 담그기다.

남자의 취미. 이번 회는 김치 담그기, 즉 김장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들이야 김장 하면 떠오르는 것이 수육과 막걸리, 굴 겉절이에 소주 등일 것이다. 험난한 김장의 과정보다는 먹음직스러운 결과물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김장하는 날은 생일같고 축제날 같은 설렘이 있었다. 입만 가지고 끼어드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실상, 김장의 주체가 되는 여자들에게 김장 날짜는 명절만큼이나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배추 절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양념 만들고 버무리고 옆에서 닦달하는 남자들에게 수육 한 접시 삶아 내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김장이 끝난 다음날, 결국엔 앓아눕던 엄마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예전에 비해 김장을 거드는 남자들의 일손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언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는 고강도의 노동은 거의 사라졌지만 절인 배추를 옮기고 힘쓰는 일에 남자가 해야 할 일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주체의 영역을 놓고 봤을 때, 여전히 거드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딱 하나다. ‘남자들이여,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에 뛰어들자!’

이번 김장의 후기부터 간략히 적어 본다. 두 가구 1년 먹을 김장 준비로 배추는 40포기를 준비했다. 김장의 절반은 배추 절이기라는데, 산지에서 절여진 배추를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일거리의 절반은 사라지는 셈이다. 전문가들이 절여서 보내준 배추여서 그런지 배추의 숨은 적당히 죽어 있고, 때깔도 곱다.

절여진 배추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양념을 만들고 배추 속을 준비한다. 양념의 비율이야 지역마다, 집안마다, 취향마다 다르므로 특별히 레시피를 공개할 필요는 없다. 양념 속을 만들기 위해 무를 강판에 갈고, 채소를 썰어 넣는다. 그리고는 버무려서 먼저 겉절이를 만들고 양념을 배추에 속속들이 묻히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번 우리 가족 김장에는 40년 만에 고무장갑을 처음 껴보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이들이 대거 참여했다. 엄마와 아내는 양념을 만들고 옆에서 수육을 삶은 게 전부다. 양념을 버무리는 과정부터 배추 속을 채워 김치 통에 담는 과정까지 대부분이 남자들의 손에 넘어온 것이다. 일종의 가정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에 김치 담그는 법을 꼭 배워두고 싶었던 나와 옆에서 막걸리 잔만 기울이는 것이 눈치 보이시는 아버지, 색다른 경험이면 무조건 신이 나는 두 아이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 낸 합작품이 이번 우리 가족의 김장김치다. 당연하게도 엄마와 아내에게서 피곤한 기색은 없다. 온몸에 양념 범벅이 된 남편들을 바라보는 것이 한편으로 행복하기까지 하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우리 다음 세대는 김치를 사먹는 가정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한다. 1인가구의 수도 대폭 늘어났고, 핵가족의 경우도 집에서 밥 해먹을 일이 별로 없으니 손이 많이 가는 김치를 담가 먹을 필요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엄마의 손맛이 담긴 김치 대신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낸 비슷비슷한 맛의 김치가 식탁에 오르게 될 거라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대로 앉아 슬픔에 잠겨 있을 수 없기에 나는 분연히 일어나 고무장갑을 꼈다. 그리고 내가 먹을 김치는 내 손으로 만든다, 라는 단순한 목표 하나를 가지고 도전하였으며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엄마의 김치 맛을 내려면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하지만 양념 배합의 비법만 전수한다면 나머지 과정은 생각 이상으로 쉽다. 라면을 끓일 수 있는 수준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끝으로 김치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몇 자 적고 글을 마무리한다. 첫째, 김치는 대단히 효용가치가 높다. 김치 하나만 가지고도 만들 수 있는 요리의 종류가 무한하다. 겉절이부터 묵은지까지 일생에 거쳐 맛과 영양이 듬뿍 담긴 요리로 변화하며 우리에게 식도락의 즐거움을 준다. 어디 그뿐이랴? 주연급으로의 활약도 눈부시지만 라면이나 국수, 혹은 수육이나 삼겹살 곁에서 온몸을 바치는 조연급 반찬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하다.

둘째, 김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다. 김장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미풍양속이다. 명절 때 말고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먹거리를 마련하고 축제 분위기를 내는 날이 또 어디 있던가. 대기업의 상술에 놀아나는 11월11일 같은 ‘듣보잡 데이’는 챙기면서, 오랜 세월 우리의 식탁을 즐겁게 해주고, 가족 친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게 해준 김장은 등한시한다는 것은 굉장한 모순이다.

셋째, 김치에는 향수와 추억이 어려 있다. 엄마는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나 또한 영원히 세상에 머물지 못한다. 그리고 전수되지 못한 김치의 맛은 다음 세대가 맛볼 수 없는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나는 부지런히 김치 담는 법을 전수해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자식들에게, 손주들에게 제삿날만 잠깐 기억되는 사람이 아닌 매번 식탁에 오르는 김치를 함께 담그던 소중한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김치의 맛은 김치냉장고가 만드는 게 아니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손 끝에서, 마음에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느꼈던 행복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junghy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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