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희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폴란드 바르샤바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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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7   |  발행일 2017-02-17 제37면   |  수정 2017-02-17
123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던 파란만장한 역사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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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 광장을 반듯하게 둘러싼 폴란드의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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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를 펼쳐놓은 것처럼 시대 흐름이 느껴지는 바르샤바 중심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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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시내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1년 내내 이어진다. 바르샤바 국립극장.

숱한 전쟁과 주변 강대국의 침략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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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옷, 전쟁용품 등 없는 게 없는 바르샤바 벼룩시장.

비스툴라江 서쪽 중심가와 구시가지
중세 성당과 고딕∼바로크 다양한 건축
발길 닿는 곳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다른 EU 국가보다 저렴한 물가 매력
향신료 넣고 데운 맥주 그르자네 피보
쇼팽 관련 축제와 특색 살린 박물관들
단 하루만 지내봐도 ‘놀 줄 아는 도시’

“올드 타운이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도대체 어디야?”

바르샤바를 여행하다 보면 여타 도시와 뭔가 다르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보통 ‘올드 타운’이라 불리며 여행의 중심이 되는 구시가지는 중앙역과 가까운데, 이 동네 역 주변엔 새로 지은 으리으리한 건물뿐이다. 구글맵을 다시 보니 구시가지는 역에서 북동쪽으로 아직 한참을 가야 한다. 바르샤바에선 올드 타운이 시내 한중간이 아니었던 거다. 이 도시 중심은 역사적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혼재된 양식의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2차 대전 후 복원된 고딕 건축, 공산주의 시절의 콘크리트 건물 그리고 유리와 철 프레임으로 마감된 현대적인 건물 같은 것 말이다.

‘비참한 국가’로 통하는 폴란드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힘든 세월을 보냈다. 1569년 지그문트 3세가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 이래 폴란드의 역사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번성했지만 짧았던 황금의 세기를 제외하면, 바르샤바는 중부 유럽의 교차점에 놓여 체스판 위 폰처럼 왕국과 제국 사이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17세기에는 스웨덴이, 19세기 대부분은 러시아가 바르샤바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폴란드 영토가 셋으로 분할돼 지도상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다(1795∼1918년). 독립을 되찾은 건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하지만 그 후엔 세계 2차 대전이 기다리고 있었고 전후에도 도시를 재건하기까지 힘겨운 나날은 계속됐다.

물론 긴 과거의 그늘이 바르샤바의 전부는 아니다. 바르샤바는 동유럽의 도시 중 가장 처참하게 파괴됐지만,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암울한 과거의 흔적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거나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깨끗하게 단장해 관광자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복구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궁전을 포함한 바르샤바 역사 지구는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다. 침략의 산물이었던 그 건축물들이 바르샤바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흔적을 품은 바르샤바는 지역적으로 비스툴라 강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뉜다. 동쪽엔 신시가지, 서쪽엔 앞서 언급한 중심가와 구시가지가 있다. 바로크, 르네상스, 고딕 양식 건물이 모여있는 구시가지 광장은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다. 광장엔 폴란드 전통 식당, 카페와 상점이 모여 있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 주변은 말발굽 모양의 도시 성벽인 바르비칸, 성 요한 성당과 같은 중세 건축물이 아름답게 장식한다. 게다가 인근 도로의 차량 통행이 대부분 제한돼 편안하게 걷기 좋다.

관광지로선 덜 알려진 곳이다 보니 이곳에 오더라도 짧게 머물다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루 안에 ‘치고 빠질’ 요량이면 마조비아 공작이 살았던 바르샤바 왕궁에서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하자.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진한 주홍빛을 발하는 왕궁에선 낭만이 느껴진다. 남은 오전 시간은 구시가지를 둘러보며 가슴 뭉클해지는 저항기념비와 아름다운 크라신스키 정원을 만나고 점심은 신시가지의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으로. 중심가 레스토랑의 2인 식사는 음료까지 더해도 웬만해선 3만원을 넘지 않는다.

도시의 다른 한편엔 유대인을 학살했던 어두운 기억이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강제 거주시킨 ‘게토’. 이 좁은 공간에 약 50만명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주거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전염병은 창궐하고 식량 배급도 부족해 게토에서만 10만명 이상이 죽었다 전해진다. 그랬던 곳이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일어나며 대부분 불에 타 무너졌고 이제 원조 거리는 단 한 군데만 남아있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참상은 바르샤바에서 촬영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 잘 드러나니 여행 전에 보면 도움이 된다.

유대인 지구에서 길을 가로지르면 바르샤바에서 가장 붐비고 특색 있는 식당이 나타난다. ‘붉은 돼지’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질 좋은 고기와 와인을 갖추고 거물급 공산주의자를 맞던 장소였다. 2006년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그려져 있던 숨겨진 벽화와 오래된 러시아 장교의 유니폼이 든 가방이 이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고. 폴란드 보드카와 전통 음악 속에서 바르샤바의 정취를 만끽할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하루를 정리하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으니, 문화과학궁전 30층 테라스에서 맞이하는 멋진 일몰이다. 이곳은 도시에서 전망이 가장 좋기로 손꼽히는 장소다. 1952년에서 1955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높이가 230.5m로 폴란드에서 제일 높다. 맑은 날 오르면 시내를 넘어 저 멀리 마조비안 평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에서 흔히 보던 모양새라 웬일인가 했더니 옛 소련 시절 스탈린이 보낸 선물(?)이란다. 폴란드인이 바르샤바에서 가장 좋다고 꼽는 곳도 바로 이 건물 ‘안’인데, 다양한 시설 때문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폴란드를 침략한 스탈린이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을 다짐하며 세운 끔찍한 건물을 볼 수 없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란다. 총 42층에 3천 개가 넘는 방이 있는데 그 방은 회의실, 연구소, 과학박물관, 극장, 카지노 등으로 채워졌다. 로비에서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려다 주는 엘리베이터도 타는 재미가 있다.

‘치고 빠지기’를 넘어 좀 더 길게 머문다면 박물관까지 세심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쇼팽의 아름다운 선율부터 유대인 게토의 비극까지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접할 수 있다. 관심사에 따라 유대인 역사박물관, 쇼팽 박물관, 퀴리 부인의 생가 또는 광범위한 컬렉션을 갖춘 국립 박물관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골동품 수집을 좋아한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곳도 있다. ‘바자르 스타로치 나 콜레’는 바르샤바의 북서쪽에 있는 대규모 벼룩시장. 2차 대전 때 사용했던 녹슨 헬멧과 전쟁 용품, 소비에트 시절의 희귀한 물건, 고가구, 청동 장식품, 오래된 책 등 진열된 모습이 대형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까지만 열리니 구경하려면 아침 일찍 나서야 한다.

요즘 같은 한겨울 여행의 가장 큰 적은 역시 추위다. 적과 싸우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 옷을 겹쳐 입고, 털이 들어간 부츠를 신고, 핫 팩을 장착한다든가. 하지만 폴란드에선 기왕이면 ‘그르자네 피보(grzane piwo)’를 선택하면 좋다. 생강과 정향, 계피 등 향신료를 넣고 천천히 데운 맥주인데 영하의 기온에 꽁꽁 얼어붙은 몸을 한 번에 녹여줄 아이템이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유럽의 광장에서 판매하는 글루바인(향신료 등을 넣고 끓인 와인)의 맥주 버전이라 생각하면 된다. 시원한 맛에 마시는 맥주를 데운다고 하면 의아할 수 있는데 꽤 맛있다.

역사적이면서 즐길거리도 다양한 이 도시는 범접할 수 없는 저렴한 물가 덕에 더 매력적인 관광지가 됐다. 다행스럽게도 바르샤바는 유럽연합의 수도 중 물가가 싼 도시 중 하나. 그래서 파리, 로마,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등 대도시에서 겪게 되는 불편한 소비가 바르샤바로 넘어오면 여행의 묘미요, 큰 즐거움이 된다. 폴란드는 EU 국가지만 유로를 쓰지 않고 현지화인 즈워티를 쓰며 소득 수준이 낮다 보니 현지 물가도 높지 않다.

레스토랑, 호텔은 물론 대중교통 요금도 아주 저렴하다. 버스, 지하철, 트램을 90분 동안 무제한 탑승할 수 있는 표가 1천300원, 24시간 이용권은 4천500원 정도다. 넥스트바이크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고 등록하면 QR 코드를 스캔하는 것만으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대여하더라도 20분 동안은 무료이므로 역에서 역 사이 거리는 무료나 다름없다. 휴대폰 데이터 요금도 상당히 싸다. 5천원이 안되는 돈으로 유심칩과 3GB의 데이터가 해결된다. 바르샤바 시내를 걷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빨간 색의 폴스키 버스(Polski Bus). 사방으로 뻗어 있는 폴란드 주요 도시는 물론 인접 국가의 대도시까지 연결하는 버스다. 무선인터넷을 즐길 수 있고, 화장실이 있고, 음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무엇보다 가격 부담이 없다. 단돈 몇천 원으로 다섯 시간 거리의 그단스크까지 간다.

바르샤바는 근래 유럽 내 디지털 노마드 사이에서 주요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바르샤바의 구글 캠퍼스에선 별도의 이용요금 없이 훌륭한 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고 각종 이벤트와 모임이 활발해 반응이 좋다.

지금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관광도시인 크라쿠프, 그단스크와는 다른 매력, 즉 문화와 최신 유행으로 중무장한 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동네 달력이 거리 행사와 특색 있는 전시회, 쇼팽 관련 음악 축제로 매년 채워진 지는 벌써 오래다. 식당가에선 전 세계 요리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고 흥으로 가득 찬 클럽과 바의 열기도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폐허가 됐던 수도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단 하루만 지내봐도 ‘놀 줄 아는 도시’라는 느낌마저 강하게 든다. 어둡고 암울했던 과거의 거리는 지금 긍정과 에너지로 들썩이고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ndroid201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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