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적폐청산, 질서 있는 개혁으로 방향전환 할 때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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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1   |  발행일 2017-11-21 제30면   |  수정 2017-11-21
미래 생각 않을 거라면
굳이 과거 왜 들추는가
인적청산 중심 적폐청산
불합리한 구조 개혁으로
미래지향적 전환 해야
20171121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선한 사람은 주위를 따뜻하게 한다. 바른 길로만 가고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은 신뢰를 얻는다. 남다른 정의감으로 충만한 사람은 존경 받는다. 그런데 가끔 이런 사람들도 주변에 상처를 준다. 선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움을 독점하려는 듯한 태도 때문이다. 선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움을 상대에게 강요까지 하면 매우 곤혹스럽게 된다. 한 발 나아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단죄(斷罪)하겠다고 덤벼들면 최악의 상황이다.

좋은 가치들을 폄훼하려는 뜻은 아니다. ‘올바른 가치가 항상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라는 달갑잖은 역설을 통해 핫이슈 ‘적폐청산’의 앞날을 고민해 보려는 것이다. 적폐청산이 국민적 호응과 역사적 필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해도 그 속에 도사린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보다 성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옳은 생각이 가끔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독선과 거친 배척, 맹목적 집착 때문이다.

적폐청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칼끝이 이제야 여의도를 향했으니 사정(司正) 능선의 6, 7부쯤에 다다랐을까. 그렇지만 벌써 20여명의 의원이 재판 또는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이번 주 최경환, 전병헌 등 거물 정치인의 검찰 소환을 시작으로 국정원 특활비, 불법정치자금, 채용비리 수사의 불똥이 튈 것이다. 대구·경북 일부 의원에게는 벌써 불티가 튀었다. 수사대상 의원이 훨씬 늘어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이뿐 아니다. 이런저런 청산위원회가 10개 넘는다. 청산위마다 추가 의혹을 계속 내놓을 것이다. 고구마 줄기처럼 의혹은 의혹을 낳고 수사는 또 다른 수사로 이어질 게다. 여기다 댓글문제, 남북정상 대화록 유출, MB 비자금, 공영방송 장악과 연예인 출연 방해 등 의혹도 수사한다니, 적폐청산은 앞으로 6개월에 6개월을 더 보태도 끝날 것 같지 않다. 수사 과정에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적폐에 대한 수사를 어찌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관행과 부패, 비리가 눈 감고 ‘나 몰라라’ 하기엔 너무나 심각하다. 전병헌 전 수석의 사표를 수리한 것을 보면 문재인정부도 적폐청산에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각오를 한 것 같다.

사정에 의존하는 적폐청산은 수명이 있다. 언제 어떤 형식으로 수명이 다할지 모른다. 다만 두 가지 경우는 예단할 수 있다.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 뜻밖의 사달이 생기는 게 하나다. 노무현의 죽음이 그랬고, 최근엔 검사의 죽음이나 법무부·검찰의 특활비 의혹도 비슷한 전조(前兆)다. 또 하나는, 문재인정부 국정 수행이 심각한 장애나 실패에 봉착했을 경우다. 인위적 중단이 없더라도 그 즈음 적폐청산은 운명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한국병 치유’를 내세운 YS의 적폐청산이 절대 지지를 받았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실패하자 국민은 한순간 등을 돌렸다.

지금의 적폐청산은 이 두 가지 위험성을 모두 안고 있다. 적폐청산이 인적청산에 치우쳐 있는 게 가장 위험스럽다. 인적청산에 머무는 적폐청산은 독선과 배척, 집착의 산물이다. 정치보복이라 해도 할 말 없다. 적폐청산은 인적청산을 넘어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과거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비리척결의 날 선 칼 대신 ‘공직자윤리법’ ‘금융실명제’ ‘역사 바로 세우기’ ‘하나회 해산’을 선택한 YS의 적폐청산 방식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거의 매일 압수수색, 구속, 새로운 비리자료 발견 소식이 들리지만 아직 뚜렷한 개혁적 정책 발표와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적폐청산은 질서 있는 개혁으로 보다 성숙해져야 한다. 미래지향적 가치와 연결돼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거라면 굳이 과거를 들출 필요가 없다.

적폐청산은 촛불의 명령이라 한다. 적폐청산이 실패하면 2016·2017년 겨울을 밝힌 촛불은 밤하늘을 반짝 비추고 사그라진 축포와 다를 바 없다. 촛불의 불멸성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것은 적폐청산의 제도화에 달려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노무현의 한탄이었다.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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