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13·<끝>] 두 번의 장원 ‘박춘보(朴春普)’와 대를 이어 급제한 그의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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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4   |  발행일 2017-12-04 제13면   |  수정 2017-12-04
[조선 문과] 영조 14년(17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영조 22년(1746) 병인(丙寅) 중시(重試) 병과(丙科) 1위
“전하의 잘못” 직언 서슴지 않았던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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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보의 막내아들 박천형도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해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였다. 호남 어사 시절 박천형은 해남에서 일어난 괘서고변사건을 해결해 명성을 떨쳤다. 영조실록 123권, 영조 50년 10월28일 무신 첫 기사에는 당시 사건을 해결한 박천형의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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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보의 둘째아들 박천행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한 관료로 이름을 떨쳤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11월21일 신축 첫 기사에는 박천행이 임금과 홍문관 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상평법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개선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선산 장원방(옛 영봉리,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 출신 박춘보(朴春普, 1694~1748)는 두 번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박춘보가 장원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버지 박학령(朴學齡) 때부터다. 조선 전기 안동지역 군사 조직이었던 안동진관(安東鎭管)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종6품 무관)를 역임한 아버지 박학령은, 장원방(영봉리)에 있던 하위지의 고택을 사들여 이사하면서 정착했다. 이후 박춘보가 태어나 이곳에서 공부하며 자랐다. 성품이 강직했던 박춘보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신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명필로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 문장이 뛰어나 선산읍성 낙남루의 상량문을 짓기도 했다. 특히 그의 둘째 아들 박천행과 막내 박천형도 대를 이어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두 아들 모두 어떤 자리에 있든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함과 균형 있는 일처리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1. 강직한 성품의 뛰어난 문장가

1738년(영조 14), 박춘보(朴春普, 1694~1748)가 무오14년식년방(戊午十四年式年榜)에서 을과(乙科) 1위를 했다는 소식은 선산 영봉리(장원방)를 오래도록 들썩이게 했다. 만취헌(晩翠軒) 박학령(朴學齡)의 아들이 다시 한 번 마을의 이름을 드높인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춘보는 1746년(영조 22) 병인22년중시방(丙寅二十二年重試榜, 승진시험)에서 병과(丙科) 1위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영봉리를 또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장원급제를 두 번이나 한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박춘보는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강직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간관(諫官)이었을 때 그가 했던 직언들은 날카롭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영조 면전에서 조정에 권세와 이익만 밝히는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건 다 임금이 잘못해서라고 대놓고 지적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박춘보를 귀히 여겼다. 핵심부서에서 여러 품계의 직을 골고루 거치도록 하였고, 그럴 적마다 박춘보는 능숙하게 처리함으로써 그 기대에 부응했다.


강직한 성품·명필로 이름 떨친 박춘보
문장 뛰어나 선산 낙남루 상량문 짓기도

둘째아들 박천행 45세 늦은 나이에 급제
어떤자리에 있든 권세 두려워하지 않아
사헌부·홍문관·승정원 등 요직 두루 역임

막내아들 박천형, 형보다 먼저 벼슬길
일처리 탁월·판단력 뛰어나 임금 신임
호남어사 재직 때‘괘서고변사건’해결
피눈물 어린 상소로 굶주린 백성 돕기도



박춘보는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가 진사였던 1733년(영조 9)에 지은 선산 낙남루(洛南樓)의 상량문(上樑文)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낙남루는 선산읍성 남문의 문루로 토성이었는데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였던 조두수(趙斗壽)가 석성으로 개축하고 있었다. 칠백 자가 훌쩍 넘어가는 이 상량문은 구구절절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선산에 대한 박춘보의 애정으로 가득하다.

대쪽 같은 성품과 부드러운 문학성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박춘보는 사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기록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네 아들을 남겼다. 천의(天儀), 천행(天行), 천건(天健), 천형(天衡)이었다. 이 중에서 둘째 천행과 막내 천형은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고, 첫째 천의와 셋째 천건은 소과에 급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하늘이 움직이듯이, 둘째아들 천행(天行)

1774년(영조 50) 8월20일, 갑오50년정시방(甲午五十年庭試榜)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치러졌다. 병석에 누워있던 영조가 건강을 회복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시험이었다. 영조가 친히 나오기로 되어있었지만, 거동이 불편한 감이 있어 영의정 신회(申晦)가 대행했다. 이날의 문과를 통해 총 20명의 합격자가 배출된 가운데, 박춘보의 둘째 아들 박천행이 병과(丙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바로 한 해 전에 있었던 넷째 박천형의 급제를 뒤이은 낭보에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급제 당시 박천행의 나이 무려 45세였다. 나무로 치자면 나이테가 골골이 여러 겹인 아름드리 거목으로, 무시할 수 없는 연륜이 그에게 있었다. 실제로 박천행은 어떤 자리에 있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포를 보여주곤 했다.

1779년(정조 3) 11월21일의 일이었다. 옥당(玉堂), 즉 홍문관 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천행이 말했다. “상평법(常平法)이 무엇입니까. 곡식이 흔할 때 값을 올려 사들여 농민을 이롭게 하고, 곡물이 귀할 때는 값을 내려 균청(均廳, 세금제도인 균역법과 관련된 일을 맡아보던 균역청)에 팔아 흉년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쌀이 부족해 그 값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외려 상인들로부터 사들이는 바람에 시중의 쌀값이 더 폭등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백성이 어찌 조정을 믿고 편히 살겠습니까. 전하께서 살펴주셔야 합니다.”

이를 듣고 놀란 정조가 알아보도록 한 결과, 박천행의 보고에 틀린 점이 없었다. 이에 정조가 탄식하며 조목조목 개선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일이 타 부서로부터 원망을 들을 수 있음에도 거리낌 없이 직언한 경우라면, 1780년(정조 4)의 일은 자신의 판단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가차 없이 비판한 성찰과 용기의 경우라 하겠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홍국영이 있었다.

당시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개혁적이었던 초심을 잃고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는데,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보낸 것이 그 노골적인 예였다. 바로 원빈(元嬪) 홍씨였다. 그런데 원빈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바로 죽은 일이 더한 화근이 되었다. 자신의 동생을 독살했다고 중전을 의심한 것도 모자라,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이담(李湛)을 원빈의 양자로 들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한 것이다. 결국 실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박천행이 홍국영을 두둔했었다. 그때만 해도 홍국영의 야심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때여서, 초기의 진실했던 홍국영을 믿은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모가 드러나자 박천행은 망설이지 않고 벌을 청했다.

“홍국영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전하를 저버리려 한 줄도 모르고 그런 발언을 한 제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부디 신의 벼슬을 삭탈하소서.” 하지만 정조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박천행의 진심이 무엇인지 잘 아는데, 그만한 일로 버릴 수는 없어서였다. 이후 박천행은 세자시강원을 비롯해 사헌부, 홍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안동대도호부사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3. 저울의 균형감으로, 막내아들 천형(天衡)

작은형 박천행보다 한 해 먼저 급제했을 때, 박천형의 나이 37세였다. 그 또한 만학이었다. 박천형이 응시한 시험은 계사49년증광방(癸巳四十九年增廣榜)이었다. 증광시(增廣試)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러지던 비정기 과거라는 점에서 1773년(영조 49)은 이모저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무려 여섯 가지를 축하했는데 현종대왕, 명성왕후, 정성왕후에게 시호를 올린 것과 중궁전에 존호를 올린 것이 그중 네 가지였다. 아울러 영조가 80세가 되는 해였고 동시에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가진 의미에 걸맞게 이날의 시험에서 무려 60명이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그중에 박천형도 이름을 올렸다.

박천형은 일처리가 탁월했다. 보는 눈이 정확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데다 균형감각도 가진 인재였다. 맡은 일을 처리하는 데 억지와 무리가 있지 않았다. 급제한 다음 해인 1774년 호남어사로 있을 때 해결한 괘서고변사건(掛書告變事件)이 기록상으로는 박천형이 처음으로 해결한 일이었다.

내용인즉슨, 해남(海南) 사람 하나가 좌수(座首)를 고발한 일이 발단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방에는 향소(鄕所) 또는 유향소(留鄕所)라고 해서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안에 좌수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는데, 특히 좌수는 나이도 많고 덕망도 높은 사람이 임명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 좌수를 고발한 사건이었다. 박천형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면밀히 조사했고, 결국 원한에 의한 무고임을 밝혀냈다. 합리에 바탕을 둔 그의 성정은 이후로도 많은 일들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데 쓰였다.

정조가 즉위한 바로 그 해, 1776년 초여름이었다.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일당들에 대한 처벌이 시작되었다.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맡고 있던 박천형도 분연히 나섰다. “당시 악행을 저질렀던 일당들을 처벌하여 마음이 조금 풀리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지난해 여름에 실시된 과거를 보면,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시험을 주관한 이들이나 그 시험에서 합격한 이들이나 모두 한 패거리로, 모두 부정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어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사를 도모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시험은 무효로 해야 합니다.”

이에 정조는 혹여 선의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도 박천형의 의견이 옳음을 인정했다. 이때 박천형을 눈여겨본 정조는 1781년(정조 5), 제주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그를 떠올렸다. “제주가 육지와 원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내 힘과 조정의 덕이 미치기 어렵다. 따라서 풍속이 어지럽고 백성들이 미혹하여 근심이 크다. 그러니 제주어사가 되어 그들의 어려움을 알아보고 고통이 있다면 위로하라. 특히 해결되지 않은 송사가 있는지 확인해 해결하고, 물정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조사해 세세히 기록해 오라.” 이에 박천형은 어명에 따라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그리고 1790년(정조 14) 곡산현감(谷山縣監)으로 재직했을 때는 “거듭된 흉년으로 누구라 할 것 없이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농사지을 형편이 안 되는 터에 조세 독촉까지 당하니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백성이 무려 4천여 명이나 됩니다”로 시작하는 피눈물 어린 상소로 구제를 얻어내기도 했다. 당시 박천형이 올린 글이 얼마나 절절했던지 정조가 깊이 탄식했다.

“어림잡은 수효가 4천여 명이라면 실제는 더 많다는 뜻 아닌가. 가엾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떠도는 그들의 심정을 어찌 말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이 고을 저 고을 경계를 가리지 말고 박천형처럼 백성을 어찌 구제할 것인지 그 방도에만 집중하라.” 이 밖에도 박천형은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승정원 등의 관직을 비롯하여 공주목사, 충청도관찰사 등도 역임하였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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