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거룩한 분노

  • 원도혁
  • |
  • 입력 2018-04-02   |  발행일 2018-04-02 제31면   |  수정 2018-04-02
[월요칼럼] 거룩한 분노

인간이 각자 부여된 생을 살면서 화를 내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살다가 분노할 일은 도처에서 생겨난다. 믿었던 지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일, 수십만·수백만원을 사기당한 일 등 그냥 체념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일에서부터 나랏돈 수십억·수백억원을 해먹은 고관대작들의 불법 횡령 사건과 같은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도 겪게 된다. 요즘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으로 드러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각종 권력자들의 구린 뒷구석도 거대한 분노를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분노와 관련, 어렵잖게 떠오르는 만담(漫談)이 있다. 우스개지만 교훈도 준다. 초·중·고교를 같이 다니며 우정을 쌓은 친구놈에게 알토란 같은 돈을 떼인 어느 샌님 이야기다. 그는 친구가 사업을 하는데 급전이 조금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5천만원을 빌려줬다. 그 돈은 전세로 살면서 내집마련을 위해 내핍생활 끝에 마련한 것으로, 몇달 뒤 새집에 입주하면서 쓸 계획이었다. 친구는 두달만 빌려주면 바로 갚겠노라고 맹세를 했고, 굳이 마다하는 차용증까지 써 주었다. 하지만 두달 뒤 친구는 사라졌고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돈 5천만원과 친구를 함께 잃은 샌님은 울화가 치밀어 불면의 며칠을 보냈다. 그런 시기가 지나자 스스로 위안하면서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단계가 됐다. ‘그 녀석이 그럴 인간이 아닌데 얼마나 형편이 급박했으면 그랬을까’ ‘그 녀석이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고작 돈 몇천만원 때문에 친구를 배신하고 잠적했을까’ 하고 오히려 그 친구를 불쌍히 여기게 됐다. 그러면서 그 배신한 친구 이름을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잊기로 작정한 그 친구의 이름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터억 나타나, 쓰라린 기억을 상기시키며 괴롭혔다. 그 친구의 이름은 ‘고정문’이었다. 건물 출입문마다 붙어있는 이 세 글자를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서글픈 상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에 대해 “때때로 도덕성과 용기의 무기가 된다”고 규정했다. 그는 노여워해야 할 대상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히 노여워해야 할 일이나 대상에 대해 “적당한 때에, 적당한 정도로, 적당한 시간 동안 노여워하는 사람은 칭찬할 만하다”고 했다.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분노의 적절한 강도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철학자나 선각자들의 충고대로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해야 마땅하다. 분노하고 거부하되 신중해야 한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자초하는 ‘역린(逆鱗)’과 같은 행위는 어리석은 것이다. 반면, 자신의 사익이 아닌 대의를 위해 분노하는 행위는 오래 칭송받는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의 정의를 위해 혼신을 다하는 분노는 의로운 분노, 즉 의분(義憤)이다. 1593년 6월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때 왜군에 의해 성이 끝내 함락되자 관기가 된 주논개가 의분을 숭엄하게 표출했다.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변 의암바위는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투신한 논개의 의로운 분노를 기억하고 있다. 이를 수주 변영로 시인은 시로 절절하게 표현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가수 이동기는 운동가 풍의 씩씩한 노래로 논개의 충절을 기렸다. ‘꽃잎술 입에 물고 바람으로 달려가/ 잡은 손 고이 접어 기도하며 울었네/ 샛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눈에 선한 아름다움 잊을 수가 없어라/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내려간/ 그 푸른 물결 위에/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빌었던 그 사랑 그 사랑 영원하리’.

불의와 부정이 판치고, 부도덕과 죄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분노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구약성서에서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려라”고 하는 등 도처에서 분노의 억제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거룩한 분노, 의분은 일어나야 한다.

원도혁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