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학의 문화읽기] 바이칼이 품은, 넓고 깊고 푸른 언어

  •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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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0   |  발행일 2018-08-10 제22면   |  수정 2018-09-21
문학박사
뇌물·불법같은 얄궂음 판쳐
절망의 시대엔 독서를 하자
그래야 차분해지고 희망적
이광수 소설 ‘유정’에 경의
희망은 큰마음이 만들어내
20180810

K형, 이제 숙질 때도 되었건만 더위가 좀체 가시질 않습니다. 이 험악한 여름을 어이 견디시는지요? 폭염도 폭염이지만 그보다 더 견디게 어렵게 하는 것은 뇌물이다, 불법이다 하는 얄궂음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만 부글거립니다. 이런 세상을 누가,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어느 한 사람이, 그 무엇 하나가 그걸 바꾸어낼 수는 없겠지요.

그런 걱정을 해서 뭐하겠느냐고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이런 세상을 누구든 걱정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조금 차분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형은 동의하실는지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 생각이 짧아서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종이책 읽는 방법 말고 다른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휴가철 어디를 가든지 잠깐씩이라도 책을 읽으며 차분해지고,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적지 않지만 휴가철에 하루 한두 시간쯤 책을 읽거나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고 그것을 어찌 휴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휴가는 재창조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생각하지 않는 휴가를 휴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K형,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용서를 구할 일이 있을 때는 바이칼 호수로 달려간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잘못을 빌기도 하고 바이칼 신에게 자비를 구하기도 한답니다. 제가 거길 다녀왔습니다. 전 세계 지표면 담수량의 20%를 담고 있다는 그 거대한 호수에 말입니다. 이광수 소설 ‘유정’을 모시고(?) 갔습니다.

“믿는 벗 N형! 나는 바이칼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오”로 시작하는 ‘유정’의 그 편지 말입니다. 1933년 9월27일부터 그해 말까지 76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최석에 대한 남정임의 정신적인 사랑을 다루었죠. 도덕적인 애정관을 넘어선 정신지상주의적인 애정관을 보여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어서 새벽 신문을 기다리던 독자들이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는군요.

이광수도 소설 속에서 “그 호수는 영원한 우주의 신비를 품고 하늘이 오면 하늘을, 새가 오면 새를, 구름이 오면 구름을, 그리고 내가 오면 나를 비추지 아니하오”라고 썼습디다. 큰 가슴이죠. 그리고 또 이 연애소설에 “조선은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사람의 마음이 작아서 큰일 하기가 어렵고, 큰사람이 나기가 어렵다고, 웬만치 큰사람이 나면 서로 시기해서 큰일 할 새가 없이 한다”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OECD 회원국, 국민소득 3천달러에 육박하는 지금 우리의 마음은 그만큼 넓어졌을까요. 오늘 부글거리는 이 절망의 뿌리가 외형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작은 마음 때문이라는 사실은 형도 나도 아는 얘기 아닙니까. ‘마음이 작아서’ 새삼 이 말에 공감하시지 않습니까? 마음뿐이 아니에요. 이 소설의 공간 배경도 주무대는 바이칼이지만 한국·중국·일본·러시아까지 4개국입니다. 우리 문학의 국제화 방향이 이런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K형, 이 글을 편지체로 쓰는 까닭을 짐작하시겠지요. ‘유정’에 대한 경의의 표시입니다. 넓고 큰마음만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바이칼과 ‘유정’이 하게 했습니다. 바이칼의 언어는 넓고 깊고 또 푸르렀습니다. K형, 부글거리는 절망을 가라앉힐 수 있는 건 희망뿐이겠죠. 그 누가 피 말려 쓴 책에 ‘희망’이란 그 새파란 단어가 있는지 찾으러 갑시다.

추신, K형 마음 씻으러 굳이 바이칼까지 가진 마십시오. 동해로 가도 되고요, 책으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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