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버스 안내양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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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20   |  발행일 2018-12-20 제30면   |  수정 2018-12-20
박봉에다 중노동의 대명사
1970년대 버스안내양 부활
근무시간·보수도 괜찮은 편
어르신들 잘 챙겨 인기 높아
아날로그적 직업이 반가워
[여성칼럼] 버스 안내양의 귀환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지금은 사라진 여성 직업으로 버스 안내양이 있다. 버스 안내양은 1961년 6월17일 여차장제(女車掌制)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여성 직업군으로 등장하게 된다. 도입 며칠 후인 6월24일자 영남일보에는 ‘명랑한 교통사업’을 위해 경북도내 합승 및 버스 차장을 전원 여자로 대체하게 되었으며, 자격은 만 16세 이상 여성으로서 ‘합승이 하루 세끼를 먹여주고 일급 3백환, 시내버스는 두끼 급식에 월급 1만2천환, 시외버스는 세끼 급식에 월급 1만2천환’이라는 근로조건이 명시된 채용 안내기사가 실린다.

이처럼 ‘명랑한 교통사업’을 위해 도입돼 여성들의 유망직종으로 떠올랐던 버스 차장의 현실은 그러나 결코 명랑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난 뒤 영남일보 기사(1962년 6월10일자)를 통해 본 합승 차장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여차장은 하루에 겨우 6백환을 받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17~20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늦은 퇴근으로 인해 대개가 통금시간에 걸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주(車主) 집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종점에 세워둔 버스 좌석에서 웅크리고 잘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들의 노동조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1970년도 신문기사를 보면 여차장은 여전히 하루 평균 18시간의 중노동을 하면서도 고작 1만800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이마저도 식대나 각종 잡부금을 제하면 실질임금이 겨우 6천원 미만에 불과하였고, 혹시라도 몸이 아파 쉬게 되면 수중에 쥘 수 있는 돈은 그나마 3천~4천원이 전부였다. 당시 물가 자료를 찾아보니 1970년 쌀 한 가마(80㎏)의 값은 6만320원이었다. 월급 6개월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 겨우 쌀 한 가마 살 돈을 마련할 정도이니 이들의 열악한 임금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들어 차장이라는 호칭이 버스 안내양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노동조건은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 임금이 워낙 적다보니 소위 ‘삥땅’이라 하여 그날의 수익금에서 소액을 몰래 감추는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되었고, 버스회사에서는 삥땅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버스 안내양에 대한 알몸수색을 감행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은 1985년 시내버스 자율화 조치로 버스 하차벨과 자동문이 설치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고 1989년 운수사업법상 안내원을 두도록 한 조항이 삭제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유니폼에 빵모자를 쓰고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를 오르내리며 “내리실 분 없으면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양. 누군가에겐 향수어린 그리운 풍경이겠지만, 막상 당사자들에겐 고달픔과 눈물로 얼룩진 애환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이런 버스 안내양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름도 안내양이 아닌 버스도우미로, 10대 후반 어린여성이 아닌 30~40대 중년여성으로, 대표적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 일자리에서 8시간 근무의 괜찮은 보수의 직업으로 새로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시골마을인 충남 태안군에서 시작해 보령시를 거쳐 얼마 전에는 우리 지역 의성군에도 버스도우미가 등장했다. 이들은 노인들이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무거운 짐을 척척 들어주고, 좌석마다 찾아가 차비를 받고, 혼자 가는 할머니에게 안부도 묻고 말동무도 되어 준다. 얼굴을 아는 사이니 차비가 몇 백 원 부족하다면 외상도 달아주고 다음번에 한꺼번에 셈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승객의 편의와 안전을 책임지며 가족보다 더 살뜰하게 챙겨주니 어르신들의 호응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가끔씩은 검은 비닐봉지에 캔 커피며 사탕·젤리를 넣어 말도 없이 좌석 위에 올려놓고 간다니 인기도 만점이다. 어르신들은 살갑게 말 걸어주고 반갑게 손잡아주는 ‘새댁들’이 있어 버스 타는 일이 즐거울 것이다. 효율화라는 명분아래 기계화·자동화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 더구나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연말 시즌이라 그런지 진정 ‘명랑한 교통문화’를 담당하는 아날로그적인 직업군의 귀환이 그지없이 반갑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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