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백인남성의 왕국이 무너지는 미국 대중문화계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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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5   |  발행일 2019-03-15 제22면   |  수정 2019-05-01
아카데미상·그래미상 등
소수자·약자에 문호개방
백인 남성 위주서 벗어나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
영화 개봉되자마자 논란
20190315

마블의 신작 ‘캡틴 마블’ 논란이 뜨겁다. 마블 영화사는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 초능력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어벤져스’ 시리즈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신작이 ‘캡틴 마블’인데 주인공이 여성이다. 지금까지 마블에서 여성 히어로 단독 주연의 영화가 없었다. 이번이 최초이고, 수많은 마블 히어로 중에서도 ‘캡틴 마블’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남성인 ‘캡틴 아메리카’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주인공이 여성일 뿐만 아니라 감독 중의 한 명도 여성이고, 작가진도 여성 위주로 구성됐다. 통상 남성이 맡는 파일럿 역할도 여성이고, 신기술을 개발하는 박사 역할도 여성이다. 북미 개봉일이 3월8일 여성의 날이기도 했다. 이러니 개봉 전부터 서구에서 ‘캡틴 마블’ 페미니즘 논란이 일었다. 우리나라 인터넷에서도 논란이 거세게 일어나며 악플과 ‘0점 테러’ 현상이 나타난다. 일부 네티즌이 영화 평점을 0점으로 주며 악평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정도로 ‘캡틴 마블’은 강력하게 여성주의를 내세웠다. 그 전엔 DC 히어로물에서 여성을 내세웠다. DC는 ‘슈퍼맨’ ‘배트맨’ 등의 히어로들로 이루어진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를 만드는데, 여기서 여성인 ‘원더우먼’을 단독 주연으로 내세운 것이다. 과거 TV 시리즈물 ‘원더우먼’에선 섹시미가 부각됐지만 DC ‘원더우먼’은 강인한 여성 전사로 형상화됐다. 아무리 그래도 ‘원더우먼’의 원래 캐릭터 성격상 비키니와 같은 노출 의상은 피할 수 없었는데 ‘캡틴 마블’은 전혀 노출 없는 의상으로 한 걸음 더 나갔다.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매력적인 여성의 외모에서도 벗어난 캐스팅으로 국내 일부 남성 네티즌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마블사도 이런 반발을 예측했을 것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마블사는 앞으로 성소수자 히어로 영화를 만들 거라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그동안 히어로 영화 주인공은 백인 남성들이 독차지했는데 이젠 차별받거나 배제당했던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문호를 열겠다는 것이다. ‘캡틴 마블’엔 마치 유색인 난민처럼 보이는 외계인들이 주인공의 우군으로 등장하고, 전형적인 백인 남성의 외형을 한 외계인 대장이 주인공의 적으로 설정됐다.

이런 변화는 마블의 전작인 ‘블랙 팬서’에서도 감지됐다. 우리나라 부산에서 촬영하기도 한 이 작품은 제목에서 ‘블랙’을 내세운 것처럼 흑인이 주인공인 히어로물이다. 가장 보수적이라던 할리우드 히어로물들이 전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카데미도 변했다. 2019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10년 만에 여성이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흑인 히어로물 ‘블랙 팬서’는 역대 히어로물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지명됐다. 외국어 영화상 수상자는 물론 시상자까지 모두 무대 위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했다. 작품상은 흑인과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우정을 그린 ‘그린 북’에 돌아갔다. 수상자를 결정하는 아카데미 위원단의 구성도 크게 달라졌다. 약 6천명인 아카데미 위원 중 유색인종 비율이 과거엔 10%대였지만 올해엔 38%로 증가했고, 여성도 49%로 늘었다.

미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그래미상도 변했다. 여성, 유색인종, 30세 이하의 투표인단을 늘려 나이 많은 백인 남성 위주의 취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2019 그래미 시상식에서 사회자와 오프닝 세리머니 출연자들을 모두 여성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인종차별 등 미국의 문제를 드러낸 흑인 뮤지션 차일디쉬 감비노가 4관왕에 올랐다. 불과 2년 전인 2017년에 흑인 여성 뮤지션 비욘세를 푸대접해 ‘화이트 그래미’ 논란을 일으켰던 그 그래미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히어로 오락영화부터 아카데미상, 그래미상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중문화계가 전면적으로 변화한다. 페미니즘, 유색인종, 이민자, 소수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도 이민자이자 성소수자인 프레디 머큐리를 조명한 것이었다. 미국 주류 대중문화계에서 백인 남성들의 왕국이 무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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