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교육에 얽매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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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0 07:53  |  수정 2019-06-10 07:53  |  발행일 2019-06-10 제17면

장자 ‘추수(秋水)’편은 황하에 가을 홍수가 난 이야기로 시작된다. 숱한 강물이 황하로 흘러들어 둑을 넘어 범람하니 사방이 온통 물로 뒤덮였다.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은 의기양양하여 자신이 천하의 모든 것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백이 물길을 따라 흘러 북해에 이르니 바닷물이 얼마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백은 한숨을 쉬며 북해의 신인 약(若)에게 말했다. “속담에 백가지쯤 되는 도리를 들으면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내가 오늘 당신의 문 앞에 이르지 못했다면 도를 터득한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을 것입니다.” 이 말에 북해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물 속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그 개구리가 좁은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도 그 벌레가 살고 있는 시간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에게 도를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이 받은 교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전문가일 것이다. 교육에 얽매인 자는 장소와 시간에 갇힌 개구리나 여름 벌레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받은 교육으로 인해 조건화된 사람이다. 학문의 분과화가 진행될수록 학자들은 보다 더 좁은 분야를 깊이 연구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바로 옆 분야의 내용에도 점점 더 무지해지는 ‘전문적 바보’가 된다. 현대 학문이 하는 일이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고 경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자연은 전문가들이 구별하는 경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자연이 어리석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은 우주에서 가장 지적인 도구 중 하나라고 우쭐대는 인간의 두뇌를 만들어 냈다. 물론 자연에도 선이 있다. 지평선과 호수의 가장자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선은 경계와 다르다. 앨런 왓츠는 경계와 달리 자연의 선은 나누는 동시에 만나는 지점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즉 자연의 선들은 ‘나누고 구분하는’만큼이나 ‘결합하고 통일’시킨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모두 경계선 긋기에 기초해 있다. 교육을 받는 것은 어디에 어떻게 경계를 그을 것인지, 그런 다음에 경계 속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배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계를 긋는 일은 한편으로는 전선(戰線)을 구축하는 일과 같다. 경계를 긋는 순간 그것을 기준으로 그 안과 밖이 서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혼돈설화와 마찬가지로 아담이 죄를 짓는 순간 그가 창조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경계 전체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아담이 배운 당혹스러운 사실은 모든 경계선은 또한 잠정적인 전선이라는 점, 따라서 하나의 선을 긋는 행위는 곧 스스로 갈등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구축한 모든 경계 중에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구별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각 과정에서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이는 대상’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한 과정의 세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세 가지를 억지로 구별한다면, 물이 흘러가는 것을 ‘흘러가는 물이, 흘러가는 행위를 하면서, 흐른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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