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학의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 호국의 달, 잊을 수 없는 슬픔을 기억하는 두가지 방식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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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4   |  발행일 2019-06-14 제38면   |  수정 2019-06-14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죽음들이 늘어난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은 그리움으로 변하고, 그 기억을 놓아버리는 건 ‘제2의 죽음’이라 책망하며 숙연해지는 시간, 6월이다. 오늘은 고통의 기억과 망각의 불안을 일깨우는 애달픈 박물관을 찾아간다.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그 아픔으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들어갈 참이다.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여백이랄 수 있는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역사 속의 인간이 겪었던 아픔과 기쁨까지 모두 공감하는 행위와 다름 없을 것이다. 또한 그 공간은 역사의 교훈뿐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든다.

캐나다 전쟁박물관 ‘메모리얼 홀’

11월 11일 11시 ‘리멤버런스 데이’ 무명용사의 묘석을 비추는 햇빛…어떤 영웅의 무덤보다 더 웅장하고 서늘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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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의 묘비에 비치는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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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전쟁박물관 비미 전투 재현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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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전쟁박물관 외경.


2017년, 캐나다 오타와의 전쟁박물관은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으로 ‘비미 리지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캐나다 군대의 프랑스 비미 리지 전투(Battle of Vimy Ridge) 승전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다. 당시 캐나다 참전 용사들은 전략 요충지 비미 능선을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영국연방 최초로 참전해 장렬하게 전사한 이들의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사흘 동안의 전투에서 3천600명이 전사했고 7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같은 전공(戰功) 덕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캐나다는 조약의 서명국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비미가 ‘세계 속에서 캐나다가 탄생한 장소’라 평가 받는 이유다.

1922년 12월, 프랑스 정부는 이 땅을 캐나다 전사자를 위한 추모공간으로 기꺼이 허락했다. 1936년 11년간의 작업 끝에 조각가 월터 올워드에 의해 비미 기념비가 세워졌다. ‘캐나다가 쓰러진 아들들을 애도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여신풍의 조각상 ‘정의(Justice)’는 전형적인 마터 돌로로사(상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자신의 이마를 칼자루에 기대고 서 있다. 캐나다 전사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진 이 기념비는 세계적인 전쟁기념물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비미를 기억한다면,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놀라운 추모공간이 이 캐나다전쟁박물관에 있다. 차분한 추모와 성찰을 위한 장소로 알려진 메모리얼 홀이다.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좁고 경사진 회랑으로 이어져 있는데, 전시물이라곤 딱 하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의 묘비 1기뿐. 하지만 그 앞에 선 관객의 가슴에는 압도적인 규모의 피라미드나 인류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영웅의 무덤 앞에 선 것보다 더 웅장하고 서늘한 감동이 밀려온다.

11월11일은 캐나다의 현충일인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11일을 기리는 의미에서 정해진 날이다. 공식적으로 교전이 종식된 시간인 오전 11시. 이 시간이 되면 이곳 메모리얼 홀의 높은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온 햇살이 홀로 놓여 있는 무명용사의 묘비를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이 묘비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들판에 남겨진 6천846명 캐나다 병사 중 한 사람의 것이다. 이 무명 병사의 묘비는 비미 리지 인근 카바레루즈 묘지로 옮겨졌다가 2000년 오타와에 있는 전쟁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캐나다는 여러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고, 캐나다 국민들은 전장에서 스러져간 안타까운 생명을 마땅히 추모하고, 가슴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 태양계의 궤도가 교란되지 않는 한, 11월11일 11시의 그 햇빛은 영원히 그곳을 비추게 될 거라는 믿음이 놀라웠다.

1953년 우리 국어교과서에 실려 1981년까지 명문(名文)으로 기억되던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 1892~1973)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구절을 문득 생각했다. 죽은 새를 비추는 초추(初秋)의 양광(陽光)과 무명용사 묘석을 비추는 햇빛이 다를 바 없음을 알겠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지난 시대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곳 전쟁박물관에 들어온 모든 관람객들은 이 묘비 앞에서 한층 숙연해진 자세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면, 잔디가 깔려 있는 전쟁박물관의 지붕은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6만여 명의 병사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국회의사당의 ‘평화의 탑’을 향해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혹시 모스 부호를 이해한다면 창문의 배열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Lest we forget(잊지 않기 위하여)’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끝까지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美 뉴욕 ‘9·11 메모리얼 박물관’

2001년 9월 11일 세계인의 기억 속 생생히 남아있는 뉴욕 테러…인연 있었던 사람들로 배치된 이름 ‘이유있는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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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원 ‘부재의 반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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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메모리얼 뮤지엄 내부. 건물 잔해를 벽으로 옮겨 놓았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사고를 지켜봤던 나에게 9·11 뉴욕테러는 또 하나 망연자실의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그게 어디 나뿐이랴. 2천977명의 희생자를 낸 2001년 9월11일의 뉴욕 테러 또한 여전히 전 세계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제 그곳은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현장’으로 남겨져 사람들을 맞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순간을 전 세계가 동시에 인식한 전례 없는 현장. 그 곳에는 사람들이 들려주고, 그들이 감싸고 있던 이야기로 가득했다.

어느 날 우연히 테드(TED)를 통해, 제이크 바튼(전시기획자, 미국 로컬 프로젝트사 대표)의 짧은 강의를 보았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세상의 박물관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역사를 만들다’라는 프로젝트 이야기는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전시기법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풀어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먼저, 전 세계에서 나온 믿기 어려운 사진과 이야기들로 어떻게 이 충격을 풀어나가야 하는가. 역사의 증인들이 박물관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박물관에 들어가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자기와 같은 다른 방문객의 목소리라면 어떨까. 그는 ‘우리는 기억합니다’라는 ‘열린 전시관’을 입구로 삼아 실제로 그 당시를 어떻게 느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 어둡고 긴 회랑을 지나는 동안 누군가가 말해 주는 역사를 ‘듣는’ 박물관으로, 현장 근처에서 테러를 목격한 417명의 증언을 ‘오디오 태피스트리’로 만들었다.

이것은 사건 발생 24시간 동안 10억명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극이 전해졌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역사란 과거의 목소리를 듣는 알음알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회랑을 빠져나오면,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 한 구절이 떠난 자들을 위로한다. “시간이 지날지라도 그대들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을 나오면 2011년 9월11일 개장된 9·11 메모리얼 파크가 있다. 5천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선작으로 선정된 작품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가 우리를 맞는다.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에 설치된 조형물인 2개의 폭포에선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 테러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과 미국인의 눈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외곽을 희생자들과 순직한 이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청동판이 둘러싸고 있다.

이스라엘 출신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는 사람들의 이름을 차별 없이 구분 없이 표시하면서, ‘이유 있는 침묵’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알파벳 순서가 아닌 사회적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남은 자의 기억으로 떠난 자의 사회적 관계를 표현한다니. 얼핏 보기에는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인연이 있던 희생자들끼리 가까운 곳에 모아져 있다. 가족끼리 혹은 같은 직장에 출근해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들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어 그 이름을 보는 유가족들이 기억을 되살리도록 했다.

알고리즘을 만들고 엄청난 양의 자료를 입력해서 서로 다른 이름을 모두 연결지었다. 그렇게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것 같은, 익명이었던 이름들이 하나하나의 삶으로 현실화된다. “너를 버리고 떠나지 않겠다”고 한 사장과 직원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3천여명의 이름들이 사회적 관계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죽은 자의 흔적이 산 자의 기억과 어울려 철저한 계산 아래 그 기억을 이은 박물관이라 말할 수 있는 9·11 메모리얼 박물관. 나는 그곳을 들어서면서부터 어떤 느낌의 울컥거림 때문에 관람 내내 힘이 들었다. 이곳을 소위 ‘월드 트라우마 센터(World Trauma Center)’로 생각하는 못난 사람들에게 ‘월 스트리트 저널’이 “사람 사이의 관계로 가득 차 있는 박물관”이라고 평한 까닭을 애써 가르쳐주고 싶었다.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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