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요즘 거짓 역사 이야기가 너무 많아…자신의 이야기만 참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기도 해”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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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6   |  발행일 2019-08-16 제39면   |  수정 2020-09-08
20190816

대개 우리는 역사를 ‘의미 있는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일정한 관심과 가치 판단에 입각해 선택된 과거의 사실’로서 규정한다. 예를 들자면 ‘팩트’라는 벽돌들을 차곡차곡 쌓으면 그 때의 상황들이 대략적인 탑으로 재현된다고 믿는 것이지.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실증주의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해석학으로 유명한 철학자 리쾨르(1913~2005년)는 역사를 역사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어. 무슨 말인가 하면, 그는 ‘시간과 이야기’라는 두껍고(우리말로 번역된 책도 두꺼워서 3권으로 나눠져 있어) 난해한(온갖 철학자와 역사학자, 문학가와 과학자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지) 책을 통해 시간을 이야기로서 포획하려고 하지. 다르게 표현하자면 역사와 시간을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해석하려 해.

미리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리쾨르에게 인간 존재를 해방하는 관건은 ‘이야기 된 시간’이고, 쓰여진 이 이야기야말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통로라는 것이야. 처음엔 나도 당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논의 속으로 약간 우회해 보자.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미메시스, 즉 행위의 모방에 대한 이론을 확장해서 세 겹의 미메시스 구도를 그려낸다. 이 미메시스는 현실과 허구가 어떻게 관계 맺는가를 보여준다. 즉 이해되기 이전에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실의 조각들로서의 미메시스(1), 이것을 형상화하여 줄거리로 만드는 미메시스(2), 이야기의 독자들이 이것을 해독하고 재형상화하면서 이야기를 현실에 붙들어 매는 미메시스(3)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거지.

물론 현실과 허구는 이 세 겹의 미메시스 속에서 중첩되고 교차되겠지. 리쾨르가 생각하는 것의 핵심은 이 역사 이야기 혹은 허구 이야기가 보여주는 ‘상상의 변주’나 ‘상상의 실험’ 속에서 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시간과 경험하지 못한 과거, 경험하지 못할 미래 시간 사이의 균열과 불협화음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이를 극복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할 때 역사와 이야기가 상호교차하면서 형상화되는 미메시스(2)는 역사에 대한 상상적 변주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질문들이 존재하는, 실존의 근본적 가능성들이 탐사되는 장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 리쾨르의 생각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이해가 잘 안가지?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예를 들어보자. 아마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으로 가장 많이 언급 되고 있는 왕들 중의 하나일 거야. 그런데 정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 혹은 미메시스(2)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혹은 기타의 자료들을 종합하면 정조에 대해서, 혹은 정조 시대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불가능할 거야. 우리는 정조에 대한 역사를 우리가 ‘해석’이라고 부르는 상상을 통해 이야기화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바로 미메시스(3)이야. 정조에 대해 온갖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역사 이야기가 상상을 통해 현실에 붙들린 미메시스(3)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

그렇다면 상상을 곁들인 아무 이야기도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일까. 확실히 리쾨르는 이야기 그 자체는 참 이야기와 거짓 이야기를 가늠하는 기준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해. 다만 이야기의 진리 문제는 이야기의 기능과 구조의 질서에 관한 문제라는 것, 이야기의 보편성은 잘 정돈된 이야기의 자기형식의 법칙을 통해 구현되고, 이것이 참 이야기와 거짓 이야기를 구별하는 이야기의 ‘진리 척도’라고 그는 말해.

물론 그는 ‘이야기는 이미 윤리 영역에 속한다. 무엇보다 이야기와 뗄 수 없이 연결된 윤리적 정당성 요청에 근거한다’고 덧붙여. 이야기는 그 자체로 논리나 기호학의 추상적 관심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이 말한 것을 책임지는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다는 것이야. 분명 우리는 주관주의가 아니라 삶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정체성을 갖고 자신을 인식한다. 나아가 자기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정체성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해당되겠지. 어쨌든 개인의 이야기든 공동체 이야기든 모든 이야기의 줄거리 구성에는 각각의 고유한 형식에 따라 규정되는 윤리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

태형아, 오늘 이렇게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를 짧게나마 이야기하는 것은 요즘 거짓 역사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야.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만이 참 역사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일들이 많아서기도 해.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팩트만이 진리를 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야. 차라리 주장하고 싶은 것은 윤리적 주체들이 더 많은 시간 이야기들을 만들고, 그것이 공공의 장에서 경합하고 갈등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 소란스럽고 짜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참고 견디며 새로운 미메시스(3)으로서의 역사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과정일 거야.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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