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생명권력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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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5   |  발행일 2019-11-15 제39면   |  수정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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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 속에서도 우리에게 죽음은 은폐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디어는 죽음에 이르는 온갖 사건 사고들 소식을 전해오지만 우리 주변에서의 죽음은 소문으로만 남는다. 사태로서의 죽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언젠가 이 글을 통해 한 번 이야기 한 적이 있는 미셸 푸코의 이야기를 오늘은 조금은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자. 푸코는 18세기 말 이전의 권력을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한으로, 18세기말 이후의 권력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한으로 이야기해. 재미있는 말이지? 그는 앞을 주권, 혹은 규율 권력이라고 하고 뒤를 ‘생명 권력’이라고 명명한다. 그럼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알아보자. 물론 핵심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지금의 생명 권력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며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지.

먼저 과거의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시대에서 주권자는 생명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자연적인 생명을 가진 신민들을 죽음에 대한 위협을 통해 복종시키고자 한다. 군주로서의 주권자는 신민들을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권리로서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빼앗는 권리, 즉 죽게 만들 수 있는 권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칼로 상징되지.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왔지. 여기서 삶이, 내버려두기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정한 생산력 발전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권자는 목숨을 빼앗고 기우제를 지내는 것 이외에 더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지.

그렇다면 이 시대가 지나고 어떻게, 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 권력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그런데 생명 권력이라고 해서 생명을 아끼는, 이를테면 휴머니즘 정신이 바탕된 권력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오히려 생명을 통치하려는 권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에서 푸코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규율적이지 않은 이 새로운 권력의 기술이 적용되는 곳은 신체를 겨냥한 규율과는 달리 바로 인간의 생명입니다. 이때의 인간은 신체로 파악된 인간이 아니라 정반대로 생명에 고유한 과정 전체, 그리고 탄생, 죽음, 출산, 질병 등으로서의 과정에 영향을 받는 거대한 대중을 형성하는 인간입니다. 출생률, 사망률, 평균수명 등의 과정이 이 생명 정치의 앎의 첫 번째 대상이자 통제의 첫 번째 표적을 구성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개별적 인간이 아니라 인구 단위로서의 대중들이 중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의 노동력 보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20세기가 지나면서 인간들의 수명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의학의 발전보다는 공중위생의 발전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공중위생의 발전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고 봐야 할 거야. 의학적 관심도 근절하기가 어려운, 더 빈번히 죽음을 야기하는 전염병보다는 생산을 저하시키는, 치료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노동력 감소, 노동 시간 저하, 에너지 하락, 경제적 부담을 낳는 항구적인 요인으로서 간주된 풍토병에 더 관심을 가지게 돼. 질병도 인구 현상의 눈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이지.

물론 이것을 전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가령 요즘의 국가 지원 예방 접종, 금연 캠페인, 출산 장려, 건강 검진 사업 등 이 모두는 이러한 권력 작동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것이어서 한 개인의 입장에서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근대 생명 권력이 노동력을 위해 ‘살게 만들기’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죽게 내버려 두기는 무슨 의미일까. 푸코에 의하면 죽음이 점진적으로 홀대받는 와중에 생명 권력이 나타나게 되었고 죽음에 대한 대대적이고 공적인 의례화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해. 이제 죽음은 개인·가족·집단·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떠들썩한 제식(制式)의 하나이기를 그치고 오히려 감춰지고 가장 사적이고 가장 부끄러운 것이 됐다는 것이지. 그렇지만 죽음이 이렇게 감춰지게 된 이유가 불안이 전위됐거나 억압 메커니즘이 변모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해. 마지막으로 푸코의 말을 인용해 보자.

“권력이 점점 더 죽게 만드는 권리가 아니게 되고 점점 더 살게 만들기 위해 사는 방식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개입하는 권리가 되자, 특히 이런 수준에서 권력이 생명을 최대화하고 사고나 우연성이나 결함을 통제하게 되자, 생명의 종언으로서의 죽음은 분명히 권력의 종언, 한계, 끝이 됩니다. 죽음은 개인이 모든 권력으로부터 도망쳐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이른바 가장 사적인 부분으로 움츠러드는 순간이 됩니다. 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권력은 죽음을 내팽개 칩니다.”

태형아, 우리의 삶과 생활은 어쩌면 대개 어떤 것의 ‘효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꼭두각시처럼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무언가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겠지. 그럴 때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어디에 놓여 있을까.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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