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밥집, 꽃집, 이웃집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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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9 07:56  |  수정 2020-09-09 14:38  |  발행일 2019-11-29 제16면
[문화산책] 밥집, 꽃집, 이웃집
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사무실 화장실과 백화점 화장실은 사뭇 풍경이 다르다. 백화점 화장실 옆 칸에서는 사온 옷을 입어보거나 ‘이거 얼마 줬다’는 게 전부라면 사무실 화장실 옆 칸에서는 “학원 갔다 왔어? 밥 챙겨 먹어!” 같은 대화들이 가득하다. 심할 땐 아이를 다그치거나 누군가와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화장실 밖 세면대로 나오면 그 양상이 달라진다. 백화점에서는 안과 밖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직장 화장실의 그녀들은 다르다. 안에서는 전쟁이 터진 듯 콩을 볶다가도 세면대로 나와서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입을 앙 다문다.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말해봤자 해결이 안 된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거나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얼굴이다. 매일 아침 종종거리고 직장에서도 가슴 한켠에 집에 불 하나쯤은 덜 끈 듯한 엄마들에게 아래 세 가지를 권하고 싶다. 내 경험에서 나온 지극히 사적인 노하우다.

첫째, 내 손을 대신할 밥집 알아두기. 좋은 재료를 쓰는 엄마손 밥집을 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나 조건에 가장 근접한 집을 찾아 가족 외식이든 아이 방과 후 혼자 먹을 밥집이라도 점찍어 놔야 한다. 내 손으로만 내 식구 밥해 먹이겠다는 환상에서 일찌감치 깨어나야 한다. 떡집 빵집도 마찬가지다. 믿을 수 있는 재료를 쓰는 집을 알아두고 빨리빨리 집 냉장고를 채워놔야 한다. 물론 돈이 좀 든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약값이 더 든다는 사실.

둘째, 꽃집이다. 워킹맘은 이곳저곳서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받을 땐 뻔뻔하게 받고 갚을 땐 확실하게 갚아줘야 프로다. 내가 좋아하는 꽃집의 플로리스트는 마음 속 한 줄의 멘트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재주를 지녔다. “제게 맛있는 밥을 자주 해주는 선배 언니가 손자를 봤어요.” 이 한마디에 고추를 형상화한 울트라 크리에이티브한 작품을 선보여 산모가 아이 탯줄과 함께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셋째, 이웃이다. 아이가 아파서 조퇴하고 온다면 그날 오후 엄마 마음은 좌불안석이다. “우리집에 가봐 줄래요?”라고 부탁할 이웃엄마가 있어야 한다. J는 우리집 비밀번호를 아는 유일한 이웃. 애들 사춘기 반항이 극에 달해 밤늦도록 연락이 안된 적이 있었다. J는 강력계 형사인 남편에게 동네를 뒤지라고 지령을 때리기도 했다. 든든했던 J, 잘 있지요?

위 세 가지를 요약하면 한마디로 ‘연대’이다. 최근 동성아트홀에서 상영된 스웨덴 영화 ‘몽키’에서 한 가족의 아픔에 마을 사람들이 연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긴팔원숭이를 두고 죽은 아이가 돌아온 것이라 여겨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 스스로 이기도록 지지해준다. 워킹맘에게도 마찬가지다. 힘들다고 도와달라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나만 힘들다’는 단절감을 넘어 연대의식으로 가야 누군가 내 아이를 돌봐준다. 지금까지 화장실에서 입을 다문 그녀들에게 띄우는 연서 혹은 문자폭탄이다.

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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