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지소미아가 물었다 “어떤 유니폼 입을 건가”

  • 이재윤
  • |
  • 입력 2019-11-29   |  발행일 2019-11-29 제23면   |  수정 2019-11-29
[이재윤 칼럼] 지소미아가 물었다 “어떤 유니폼 입을 건가”
논설실장

우리 스스로에게는 아쉬움 가득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분을 삭이기 힘들고, 미국에는 섭섭함이 있다. 한·일 사이의 지소미아가 순식간에 한·미 현안으로 돌변할 줄이야. 정부도 ‘미국 변수’를 간과했다. 자존심과 국익 사이에서 결국 국익을 선택했지만 자존심 구긴 건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의 열두 척 배와 죽창가까지 들먹이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던 결기를 상기하면 겸연쩍을 뿐이다. 구긴 자존심에 속상했을 텐데, 국민 10명 중 7명꼴은 이번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한다니 그 성숙함이 놀랍다.

지소미아 사태는 값진 경험이다. 첫째, 우리 실상을 냉철히 돌아볼 기회였다. 둘째, 우방의 생각을 확인한 것도 큰 소득이다. 셋째, 우리가 나아갈 길을 어떻게 리셋(reset·재설정)할 것인가를 점검하는 계기였다. 대한민국은 군사력 세계 7위, 경제력 11위의 강국이다. 미국도 ‘부자 나라’라 치켜세운다. 그러나 강하다고 모두에게 강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장(戰場)은 가히 프리미어 리그급이다. 세계 최강의 나라들이 맞붙는 현장이다. 미국(경제력 세계 1위·군사력 1위), 중국(2·3위), 일본(3·6위), 러시아(12·2위) 모두 너무 강하다. 강한 팀을 상대할 때는 화려한 공격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게 효과적이다. 이념과 자존심을 앞세워 공격적 만용을 부리다가는 위기를 자초한다. 더 강해질 때를 준비하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중국을 강하게 만든 도광양회 전략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지소미아전(戰)의 따가운 가르침이다.

소위 ‘유니폼 논쟁’은 본질적 사안이다. 미국이 지소미아 연장을 요구한 것은 한·미·일이 같은 유니폼을 입자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같은 팀 유니폼을 왜 당당히 착용하지 않느냐는 항의성 압박이다. 미국의 최대 적은 중국이다. 한·미·일을 ‘원팀(One-Team)’으로 묶어 중국을 상대하려는 게 미국의 전략이다. 우리는 다르다. 중국과 북한은 적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교역국이고 분단된 형제나라다. 어떤 유니폼이 좋을까. 딜레마다. 그렇지만 원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이 숙명은 역사성과 현실성을 반영한다.

더 거대한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냉전적 속성을 지닌 ‘진영 재편’이 동북아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은 이제 시작이고 진영 충돌이 불가피하다. 중국의 패권주의와 북핵 위협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回歸) 전략(Pivot To Asia)’이란 새 흐름이 있다. 전략적 타깃이 ‘중동’에서 ‘중국·북한’으로 바뀌었다. 변화를 불러온 ‘게임 체인저’는 엉뚱하게 셰일혁명이다. 중동은 세계 자원의 보고다. 미국 자신을 위해서든, 우방을 위해서든 막대한 군사·경제적 대가를 치르며 석유와 중동을 지켜왔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충분히 쓰고, 남은 것은 수출할 만큼 엄청난 셰일석유가 미국내에서 쏟아지고 있다. 우방을 위해 더 이상 중동을 지킬 이유도 없다. 이제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한다. EU(유럽연합)에도 그렇게 말한다. ‘The Absent Superpower-슈퍼파워 없는 세계’란 새 패러다임의 출현이다. 우방에 막대한 방위비 청구서가 날아온 하나의 배경이다.

그런데 미국이 손 놓을 수 없는 게 있다. 중국의 패권주의다. 미국이 아시아로 회귀하는 까닭이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역은 싫지만 패권은 유지하려 한다. 인도-태평양 전략이 그래서 나왔다. 중국 포위 전략이다. 핵심 동맹은 일본이고, 핵심 변수는 한국이다. 일본은 말 잘 듣는 힘 센 나라라 든든하다. 한국 태도가 애매하다. 한국이 원팀의 당당한 일원이 되느냐, 중국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미 전략이 달라진다. 그래서 지소미아가 물었던 것이다. “한국, 어떤 유니폼을 입을 건가?”

지소미아 유지는 동북아 대립구도 속으로 우리가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관계가 먼저 꼬일 것이다. 핵문제는 더 풀기 어려워진다. 중·러의 협박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신냉전의 찬바람이 몰려온다. 굳건한 동맹관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된다. 우리의 선택지가 넓어 보이진 않는다.

논설실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