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20] 옛 절터 영암사지...‘시절인연’으로 쇠락 맞았나…황매산 남쪽 기슭에 숨은 신비의 절터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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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26 08:23  |  수정 2021-07-06 10:25  |  발행일 2019-12-26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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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영암사지의 초겨울 풍경. 금당터와 삼층석탑 주변의 모습이다. 영암사지는 뛰어난 석조 문화재와 멋진 황매산의 풍광과 어우러져 최고의 폐사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색색의 단풍들이 마지막 빛을 발하고 우수수 떨어지는 만추의 계절, 산천초목이 민낯을 드러내는 초겨울에는 폐사지 분위기가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저런 발원으로 창건되어 번성하던 사찰들도 시절 인연을 맞으면 쇠락하고 사라진다. 그곳을 일구고 영위하던 사람들은 떠나고 온기 있던 건물도 사라져버린 폐사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겨울을 맞은 나목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합천 황매산 아래에 있는 영암사지가 떠올랐다. 20여년 전에 갔던,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때때로 들던 곳이다. 빼어난 암봉의 황매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경관이 멋진 데다, 뛰어난 조각 솜씨에다 흥미로운 점들이 많은 석조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호젓한 분위기는 여전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남 합천군에 있는 황매산(해발 1천108m)은 주 봉우리를 크게 하봉, 중봉, 상봉으로 나눈다. 이 봉우리들이 합천호의 푸른 물에 비치면 마치 세 송이 매화꽃이 물에 잠긴 것 같다고 해서 ‘수중매’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산이다.

◆최고의 폐사지로 손꼽히는 곳

지난 11월15일 맑은 날 오전에 영암사지로 향했다.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다. 생각대로 관광객들이 없어 호젓했다. 다만 영암사지에서 포클레인 한 대가 땅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20여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동안 발굴이 계속되면서 축대와 건물터 등이 많이 복원·정비돼 있었다.

영암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사찰터로 추정된다. 발굴을 통해 불상을 봉안했던 금당을 비롯해 서금당, 회랑, 부속 건물 등의 터가 확인되었다. 금당은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곳의 많은 석조 유물 중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 2개의 귀부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통일신라시대 폐사지로 추정돼
발굴 통해 금당·회랑터 등 확인
쌍사자석등, 석조문화재 대표작
간결한 삼층석탑 소박함 보여줘
유홍준 ‘답사여행 비장처’ 꼽아


1964년 6월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영암사지는 1984년 1차 발굴(금당터, 부속건물터, 석등, 석탑 등) 이후 4차례(1999·2002·2009·2011년) 더 발굴이 진행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저자인 유홍준씨가 “답사여행의 비장처(秘藏處)로 가장 먼저 손꼽는다”고 이야기한 영암사지는 많은 사람이 최고의 폐사지로 거론하는 곳이다.

이 영암사지에 가면, 수령 600년(2002년 보호수 지정)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먼저 맞이한다. 느티나무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발굴해 정비한 금당터와 석등,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이 많이 정비되어 예전에 느꼈던, 자연스러운 폐사지 분위기와는 좀 다른 모습이어서 한편으로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폐사지는 건물이 없어 남아있는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고, 거기에 새겨진 문양이나 동식물 등을 찬찬히 살펴보며 즐길 수 있는 점이 좋다. 금당터 계단 측면의 소맷돌(돌계단의 난간 부분)에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천상의 새로 여기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이 새는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로 극락조라고도 부른다. 머리와 팔 등 상체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새의 머리깃털이 달린 화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기단 면석에 전통 문양의 하나인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의 안상 안에 동물 모양을 돋을새김해 놓고 있다. 대부분 사자 모습인데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금당터 앞에 서 있는 쌍사자석등은 이곳에서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운 석조물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추정된다. 황매산을 배경으로 올려다보면 더욱 멋지게 다가온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위는 지붕돌로 덮고 아래는 3단 구성의 받침을 두고 있다. 4개의 창이 난 화사석의 4면에는 돋을새김의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쌍사자로 된 중간받침 이외의 모든 부분은 8각으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1단의 받침돌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고, 8각 면에는 동물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2단의 쌍사자는 꼬리를 꼿꼿하게 치켜든 모습으로 위를 떠받치고 있다. 다리의 근육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역동적 모습이다.

◆흥미로운 석조 문화재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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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사지 금당터 앞에 서 있는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속리산 법주사의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함께 우리나라의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이 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반출하려던 것을 주민들이 막아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하다가, 1959년 절터에 작은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석등은 높이 쌓은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석축 양 옆으로 무지개형 돌계단이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다. 매우 흥미로운 돌계단이다. 매우 좁고 경사도 심해, 성인이면 발을 다 붙일 수 없어 발뒤꿈치가 허공에 뜨게 된다. 일곱 계단의 돌계단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석등 아래 마당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한 화강암 석탑이다. 몸돌의 비례가 정형을 벗어나 있지만, 전체적 균형을 잃은 것은 아니다. 각 부분의 구성도 간결하여 소박한 느낌을 준다. 탑의 규모가 비교적 작고 지붕돌 아래 부분의 주름이 4단으로 되어 있어, 5단으로 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보다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후반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당터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며 귀부가 있는 서금당터가 나온다. 귀부는 주춧돌 등이 남아있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동쪽 귀부는 길이가 255㎝이고 폭은 194㎝이다. 서쪽 귀부는 길이 219㎝에 폭 170㎝의 크기다.

영암사지는 아름다운 석등과 석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잘 남아있지만, 그 내력은 아직까지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절터다. 그 터로 보아서 매우 규모가 크고 화려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곳 사찰은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을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영암사에서 큰 법회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왕자가 영암사에서 열리는 법회 참석을 위해 말을 타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영암사 앞 계곡의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마침 법회의 시작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놀란 말은 왕자를 태운 채로 계곡으로 떨어졌다. 왕자는 큰 중상을 입어 반신불구가 되었다. 이에 진노한 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절을 불태우게 하였고, 영암사는 사라지고 말았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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