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필리핀식 정치세습, 국민이 납득할까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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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23   |  발행일 2020-01-23 제30면   |  수정 2020-01-23
대이어 지역구 아들에 승계
文의장 세습 필리핀과 닮아
정치판까지 세습 관행 곤란
민주당의 공천선택지 관심
보은보다 국민정서 우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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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정치세습은 음습하고 고질적이다. 역사적 뿌리도 깊다. 19세기 말 스페인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 필리핀을 식민지배한 미국은 유산자(有産者)에게만 투표권을 줬다. 그러자 유력 가문이 투표권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선거는 정치 족벌 및 지역 토호들의 세력 대결의 장(場)이 되고 공직은 세습의 도구로 전락했다. 미국의 제한적 투표권 허용이 정치세습의 토양을 만들어준 셈이다.

지금도 마르코스, 아키노, 아로요 가문 등 150개 족벌이 필리핀 정치를 지배한다. 금권선거를 통한 정무직 세습도 다반사다. 뉴욕타임스는 40여 개 정치 가문이 필리핀 GDP(국내총생산)의 76%를 장악하고 있으며, 하원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의 80%가 정치 족벌과 직간접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치러진 필리핀 중간선거에선 두테르테 대통령의 장녀 사라가 다바오 시장 3선에 성공했고 장남은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차남 역시 선출직인 다바오 부시장직을 꿰찼다. 농(濃)하고 끈적한 필리핀 족벌정치의 단면이다.

일본도 정치세습 국가에 속한다. 아베 신조 등 4명이 세습 총리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선 보기 드문 진기록이라 할 만하다.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1957년부터 3년간 총리를 지냈고,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1970년대 총리를 역임한 후쿠다 다케오의 아들이다. 2008년 총리에 취임한 아소 다로의 외할아버지 요시다 시게루는 2차 대전 후 두 번이나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할아버지가 총리를 역임했다. 의회도 만만찮다. 중의원 의원 465명 중 26%에 해당하는 120명이 세습 정치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를 이어 금배지를 단 의원들이 적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엔 김상현·김영호, 노승환·노웅래 부자(父子)가 있고, 자유한국당에선 김진재·김세연, 정석모·정진석, 정운갑·정우택, 이중재·이종구, 장성만·장제원, 김세배·김종석 의원이 부자 선량(選良)으로 이름을 올린다. 새보수당의 유승민 의원과 우리공화당 홍문종 의원의 부친도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치세습에도 급(級)이 있다. 그중 필리핀이 가장 저열하다. 노골적 세습에다 유력 가문의 정치농단이 고착화된 까닭이다. 미국과 영국은 정치 명문가란 후광을 업을망정 지역구 조직 등을 오롯이 세습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예 지역구가 다르거나 같은 지역구라 해도 바로 승계하는 사례는 드물다. 나름 암묵적 계율이 지켜졌던 거다. 가문의 명망(名望)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는 것까지야 굳이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한데 문희상 국회의장의 아들 문석균씨는 이례적이다. 지금껏 문 의장이 관리해오던 경기도 의정부갑 선거구에서 바로 출사표를 던졌다. 문 의장의 조직·인맥 등 정치적 자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는 점에서 필리핀의 정치세습을 닮았다. 물론 공천 문턱을 넘어야 하고 지역 주민의 표심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밑천 없이 들이대는 정치신인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100m 경주에서 50m 앞서 출발하는 꼴이다. 문석균식 정치세습이 고까운 이유다. 조국 사태로 문재인정부의 '공정'은 이미 많이 훼손됐다. 선출직을 뽑는 정치판까지 이너서클의 세습관행이 작동해선 곤란하다. 민주당이 15곳의 전략공천 지역에 의정부갑을 포함했지만 변수는 남아 있다. 의정부갑 후보로 누굴 공천할지 민주당의 선택지가 궁금하다. 패스트트랙 법안 통과의 판을 깔아준 문 의장에게 보은할까. 국민정서를 우선할까.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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