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와 섬유 찬란한 여정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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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8   |  발행일 2020-02-28 제33면   |  수정 2020-02-28
다른 산업 성장 방해한 호황의 덫
한 세기 넘기며 맛본 영광과 좌절
밀라노프로젝트·韓패션센터 건립
영욕 세월 딛고 새 버전 웅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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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첫 양복 부문 명장이 된 베르가모 양복점 대표인 김태식씨와 반세기 동고동락해 5㎝ 정도 짧아진 재단용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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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년간 대구 섬유의 호경기를 구가해 온 유명 섬유업체 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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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유일의 섬유전문박물관인 '대구섬유박물관'. 2015년 오픈된 이곳에 오면 한국섬유는 물론 대구 섬유의 뒤안길을 촘촘하게 알려주는 각종 직기와 천, 심지어 특수섬유의 세상까지 다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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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섬유의 새로운 웅비를 위해 2001년 대구국제공항 청사 초입에 세워진 대구 섬유를 의미하는 얼레와 실타래 조형물.


"대구의 부(富)는 과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깔깔이지."

"깔깔이, 그게 뭐죠?"

요즘 사람에겐 실감 나지 않는 단어. 하지만 그 시절 사람이라면 그게 신통방통한 꿈의 섬유인 '나일론(일명 다후다)'이란 걸 다 알았다. 깔깔이 양말과 깔깔이 한복은 그 시절 신형 스마트폰보다 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모직의 제왕 '제일모직', 나일론의 황제였던 '한국나이론(코오롱)'. 이 어마 무시한 두 공룡기업의 출발지는 대구. 일제강점기 대구 섬유는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다. 무게 중심은 서울의 경성방직(경방)과 부산의 조선방직(조방)한테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한국섬유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게 제일모직과 코오롱이다. 둘은 베틀에 의존한 재래식 섬유직물시대를 단번에 종식시킨다. 나일론보다 몇 수 위의 변화무쌍한 질감을 선보였던 꿈의 섬유 폴리에스터직물(1968년)까지 품으면서 대구를 한때 세계 최강(1985년 한국이 일본을 제침) 화섬직물 수출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동국, 갑을, 신라, 성안, 쌍마, 삼일, 협성, 이화, 남선….

한 세기를 넘긴 대구의 섬유 역사.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았다. 대구 섬유는 '메가트렌드 섬유시대'를 리딩하지 못했다. 해외시장·첨단기술·패션감각·미국 쿼터제·중국의 잠재력 등에 둔감했다. 한심하게도 부동산투기 반사이익으로 그 위기를 돌파하려는 사장들도 생겨났다.

쓰나미로 다가선 IMF 외환위기는 대구 섬유를 절망시킨다. 기라성 같던 공장이 줄줄이 도산하기 시작한다. 서문시장 천장사로 자본을 모아 1965년 동국방직·합섬을 차렸고 78년 지역 업체로는 처음으로 수출 1억달러를 달성,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동국무역의 백욱기도 무릎을 꿇고 만다. 2008년 동국은 TK케미칼에 흡수돼 버린다.

맞춤옷에 기댄 패션디자이너들과 양복·양장점도 70년대 반도패션에서 2000년대 유니클로로 이어진 기성복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한다. 대구 능금이 황금 왕관을 다른 도시에 넘겨 주듯,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선다. 한 때는 섬유천국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세상에 제때 적응 못한 대구는 '섬유지옥'이었다. 되레 섬유가 다른 산업의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었다. 지역 언론이 30년간 섬유체질 개선을 외쳐댔지만 섬유자본은 '온리(Only) 섬유'만을 외쳐댔다. 호황 신화의 덫에 갇힌 청맹과니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문희갑 대구시장 시절 대구상공회의소를 방문했을 때 고(故)채병하 회장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후약방문 같은 밀라노프로젝트가 가동된다. 1998년부터 5년간 6천800억원이 투입되는 '대구경북 섬유산업 육성방안', 일명 '밀라노프로젝트'가 발진된다. 그로 인해 2000년 한국패션센터가 태어난다. 그걸 딛고 동구 봉무동에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이 개원된다. 그리고 2015년 국내 유일 섬유박물관인 대구섬유박물관이 이시아폴리스 내에서 개관된다.

취재를 위해 섬유관련 여러 콘텐츠를 훑어봤다. 섬유와 관련된 각종 기관과 단체, 업체 등이 이렇게 거미망처럼 엮인 곳도 없다. 살펴보니 스스로 살아남은 섬유 영웅이 적잖게 자력갱생의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대구 섬유는 뭔가 1% 부족해 아등바등하는 것 같다. 그 1%의 각도는 과연 뭘까?

나는 대구 섬유, 그 영욕의 세월이 부디 새로운 버전으로 비약할 것을 예감하며 대구 섬유 황금기로 떠나는 타임머신을 탔다.

한 섬유인이 날 보며 반색을 한다. 추인호였다. 대구 섬유를 재래식에서 신식 모드로 체인지업시킨 인물이다. 그는 1905년쯤 일본 도요타사로부터 면직기를 구입해 대구 동구 지묘동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당시 길쌈꾼에겐 실리콘밸리 드리머로 보였을 것이다.

1918~20년 대구는 명주로 먼저 유명해진다. 일본은 양잠업 신천지였던 상주 등 경북 각처의 풍부한 원료를 이용해 명주실 공장을 세워 일본으로 퍼 날랐다. 이때 하급품이 시중으로 흘러든다. 보부상에 의해 대구 명주가 전국 각지로 전해지자 타 도시 공장들도 명주를 벤치마킹한다.

일본계열의 조선방직·대한방직·삼호방직 대구지사가 생겨난다. 지역 토착 섬유 자본은 달성공원을 끼고 성장했다. 일본은 침산동, 동인동 등 중·남구쪽을 공략한다. 당시 20여 개의 한국계 직물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규모 면에서는 서울과 부산에 비할 바는 못됐다. 전국 최고의 조선방직은 610대의 직기를 갖고 있었다. 47년 조사에 따르면 국내 수공업 방식의 역직기 전국 보유 대수는 1만2천여 대. 한민족 동족상잔이었던 6·25는 되레 대구한테는 '신의 한수'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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