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 1부-경북의 戰線 .5·〈끝〉] 영덕 장사상륙작전

  • 남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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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3-12   |  발행일 2020-03-12 제18면   |  수정 2020-03-12
군번없는 유격대 6일간의 전투
빗발치는 포탄·성난 파도 뚫고 학도병 772명 백사장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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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원들을 장사리에 상륙시킨 문산호는 거친 파도와 인민군의 집중포격으로 해안 암초에 걸려 좌초됐다. 〈영덕군 제공〉

1950년 9월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다. 전세를 완전히 뒤집은,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린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9월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곽경택 감독)이 개봉되면서 일반에 좀 알려진 정도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4일부터 시작해 19일까지 엿새간 영덕 장사리에서 펼쳐진 장사상륙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군의 관심을 동해쪽으로 돌려 오판을 이끌어내게 할 목적으로 기획된 아군의 기만전술에는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한 어린 학도병 772명이 투입됐다. 이 전투에서 학도병 139명이 숨지고 92명이 부상을 당했다. 유격대원 중 현재 생존자는 30여 명에 불과하다. 그날의 긴박했던 상황을 이들의 증언과 육군본부자료 등을 참고해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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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급파된 조치원호가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유격대원을 철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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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772유격동지회장에게 보낸 친서.

북한 인민군이 6월25일 T-35탱크를 앞세우고 기습남침을 감행한지 한 달도 안돼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 동쪽인 포항과 영천까지 속절없이 밀렸다. 서쪽은 낙동강과 인접한 마산·부산 정도만 남겨둔 채 인민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8월 들어서는 상태가 더 악화됐다. 낙동강 방어선 동쪽 끝 영덕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이 후방을 차단 당한 것. 결국 3사단은 16∼17일 해상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고, 전선은 더욱 남하해 포항 남쪽 형산강을 경계로 인민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적군 집중사격·배 좌초 진퇴양난
육지와 밧줄로 연결 어렵게 상륙
유격대 대부분 영남지역 중·고생
전투과정 139명 숨지고 92명 부상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은 공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개전 초기부터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적의 거침없는 진격에 일격을 가하고 인민군 주요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 배후 상륙뿐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장소였다. 미 합참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형 조건이 나쁜 인천을 선택한 맥아더는 작전 성공을 위한 미끼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게 영덕 남정면 장사리 기습상륙작전이었다. 적의 이목을 동해안으로 돌리고 인민군 제5사단과 제2군단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해 적 후방을 교란하는 게 목적이다.

육군은 1개 대대 규모로 편성한 유격대를 장사리 해안으로 투입하기로 하고, '국군 제3사단이 포항 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할 때 적의 후방을 교란하도록 한다'는 임무를 내렸다. 곧이어 당시 한국군 작전을 통제하던 극동 미군사령부를 통해 부산에 있는 한국 해군의 수석고문과 미군 루시 중령에게 지원 지시가 내려졌다. 또 이 작전을 위해 이명흠 대위가 지휘하는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차출됐다. 이 부대는 육본 계엄민사부 동원과장이었던 이 대위가 대구역 광장에서 3일간 마이크를 잡고 직접 모집한 학생 212명과 경남 밀양에서 이미 모병된 학생·청년 560명이 합해져 총 772명으로 구성됐다.

이 대위의 이름을 따 '명부대'라고도 불린 유격대는 8월27일 밀양에서 편성됐으며 대부분이 보름 정도의 훈련만 받은 '학도병'이었다. 거의 영남지역 중·고생으로 이 중 80%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18∼19세에 불과했고 심지어 15세의 어린 학생도 포함됐다. 부대가 편성됐지만 처음엔 체력과 정신교육 위주로 교육이 진행됐으며, 정식 군번이 없는 '육본 직할 유격대원'이란 대원증이 지급됐다.

무기가 없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장비로 훈련을 받고 유격훈련조차 2주일을 채우지 못한 9월 초. 마침내 '육본 작전명령 제174호(1950.9.10)'로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은 명부대장에게 "인천상륙작전에 모든 정규부대가 동원됐기에 이 작전을 감행할 가용병력이 없어 유격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위는 처음엔 강력히 반대했지만 육본의 결정사항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막내동생과 같은 어린 학생을 사지로 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많이 괴로워했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14일 오전. 독립제1유격대대는 부산 육본 연병장에서 한국 육해공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과 다수의 군장성이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을 가졌다. 이들 전원은 출동에 앞서 각자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 일부를 자른 뒤 봉투에 넣어 육본에 보관했다. 장비가 없는 것은 물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학도병이 대부분인 독립제1유격대대였지만 정신력과 사기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날 오후 4시 유격대는 부산항 제4부두에서 2천700t급 LST 문산호(대한해운공사 소속)에 승선했다. 출발 당시 승선인원은 이 대위 이하 유격대원 772명, 문산호 선장 황재중 등 선원 42명, 미군 장교와 하사관 2명, 육본 파견 제51통신대 통신병 12명 등 총 841명이었다.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차고 파도가 높았지만 문산호는 미 해군 구축함 엔디코트함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을 떠나 장사리로 향했다.

장사리는 포항 북쪽의 좁은 해안에 위치한 어촌으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인민군은 해발 200m의 남쪽 지경리 고지와 북쪽 부흥리 고지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5일 오전 5시 유격대원을 태운 문산호는 상륙 목적지인 장사리로부터 4㎞ 떨어진 해상에 도달했지만 짙은 안개와 거친 파도 때문에 해안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때 북한군이 부흥리·지경리 고지에서 문산호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 왔다. 적의 포탄이 선장실을 뚫고 들어와 선장실 기기와 주요 기관부가 파손됐고 사상자도 일부 발생했다. 문산호는 적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도, 백사장으로 접근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때 명부대장 이 대위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7명의 특공조를 차출해 백사장에 있는 소나무에 밧줄을 매도록 지시했다. 상륙을 시도하던 몇 명의 대원이 5∼6m에 달하는 파도에 휩쓸려 희생되는 안타까운 상황도 벌어졌지만 미 구축함의 포격에 힘입어 4조의 밧줄로 문산호와 해안지점을 잇는데 성공했다. 대원들은 해안 약 30m 거리에서 로프를 이용해 상륙을 시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적의 집중사격은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학도병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면에 있는 적의 초소와 좌우의 높은 고지에서 맹렬히 쏘아대는 적의 사격망을 뚫고 상륙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 거친 파도와 적의 집중포격에 노출된 문산호는 해안 근접 1시간 만인 오전 6시 암초에 쐐기처럼 단단히 박혀 결국 좌초했다. 이 대위는 전 대원에게 상륙 명령을 내렸다.

장사리 해안은 불빛과 소음, 그리고 포연으로 가득찼다. 일부는 적 총알에, 또 일부는 강한 파도에 속절없이 희생됐다. 빗발치는 사격망을 어떻게 뚫어낸지도 기억조차 못할 즈음 발이 땅에 닿았다. 이때가 오전 9시. 당시 유격대 부관이었던 백운봉씨는 "상륙과정에서 60여명이 전사하고 9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회고했다. 상륙에 성공한 유격대는 현역 이상의 투혼을 발휘했다. 6일간의 치열한 교전을 통해 장사리 일대 인민군 소탕, 고지 점령, 교두보 확보 및 보급로 차단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결과적으로 인민군 제5사단과 제2군단의 주력부대와 전차 4대를 동해안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일 오전 6시. 부산에서 급파된 해군수송선 LST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하면서 철수가 시작됐다. 유격대원은 구명대에 5∼6명씩 나눠 타고 육지로부터 연결된 로프를 잡고 주렁주렁 매달려 조치원호까지 이동했다. 이때 잔존해 있던 적의 사격으로 9명이 전사하고 12명이 부상을 당했다. 철수는 이날 오후 3시까지 계속됐으며 다음날 오후 8시쯤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철수 병력의 엄호를 위해 장사리에 남아 있던 제5대대 병력 39명은 적의 포로가 됐다. 포로가 된 이들은 퇴각하는 북한군에 끼여 북으로 끌려갔으며 4명만 겨우 도망쳤다.

부산항에 도착한 독립제1유격대원들은 9월21일에서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소식을 처음으로 듣게 됐다. 장사상륙작전으로 아군은 어린 학생 139명의 생명을 잃었으나 북한 인민군은 27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대원은 영주초등학교에서 주둔하던 중 10월5일 입대명령과 함께 036군번을 전달받고 그해 11월 양주와 홍천 등지의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1960년 10월31일 772유격동지회장에게 감사와 격려의 친서를 보냈다.

영덕=남두백기자 dbna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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