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담론] 동냥구걸 변천사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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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03   |  발행일 2020-04-03 제36면   |  수정 2020-04-03
4년마다 찾아오는 여의도 풍각쟁이
서민의 恨, 흥으로 풀어주는 각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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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품바축제 선발대회에 출전한 한 품바의 모습.

지난해 말 대구미술협회와 알렉산드리아미술협회의 국제미술교류전 관계로 이집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다행히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직전이어서 환승국가 공항에서 격리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수도 카이로에 여장을 풀고 찻길로 3시간 거리인 알렉산드리아를 오가던 전시 기간 중 틈틈이 고대 이집트 유적지를 찾았다.

외국에 나가보면 흔히 관광지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빈민들의 생활풍습인 동냥(구걸) 문화. 이번에도 예외 없이 가는 곳마다 우리 일행을 먼저 맞아주는 사람은 맨발의 어린 아이들이었다. 한꺼번에 네댓 명씩 몰려와 손을 내밀고 "원 달러!"를 외치며 숫제 적선(積善)을 호소하는 거였다. 마치 조직적인 듯 아이들을 앞세운 어른들마저 허접한 기념품을 보따리째 내밀며 "아이 러브 코리아!"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자유로운 관광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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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떠돌며 웃기고 동냥하던 '품바'
베잠방이에 쪽박 찬 타령꾼 '각설이'
무애박으로 춤추며 노래한 소성거사
편안함 깨치는 화엄경 화쟁사상 승화
현대판 풍각쟁이 원조 '왕초'의 김춘삼
전쟁고아 돌보고 자활개척단 활동 앞장

10여일 뒤 마스크 쓰고 투표하는 총선
표 구걸하는 가짜 각설이·품바들 난무
거짓 공약으로 거지 국민 만들지 말길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의 국가 빈민들이 이렇게 살아간다고 한다. 최빈국이면서도 IT천국이라는 케냐에선 아예 구걸도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최첨단이라고 했다. 수도 나이로비 거리에는 "배가 고프다"며 손을 내밀고 적선을 호소하는 빈민들에게 "현금이 없다"고 거절하면 으레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모바일로 달라"고 요구하기 일쑤라고 한다. 이른바 핀테크(Fintech·모바일 결제·송금) 서비스다.

구걸 문화는 부자 나라 미국 뉴욕의 맨해튼 거리에도 있고 영국 런던 피커딜리 광장이나 프랑스 파리의 센강변, 이탈리아 로마의 트레비 분수대 등 주요 관광지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선진국의 구걸 문화는 격이 좀 달라 무턱대고 떼를 쓰지 않는다.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거리의 악사와 피에로(어릿광대)가 즉석 공연으로 적선을 유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거리의 악사라면 으레 타령꾼 각설이와 동냥꾼 품바가 떠오른다. 장터를 떠돌며 타령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동냥하던 풍각쟁이를 낮춰 부르는 고유명사. 대개 각설이 따로, 품바 따로 2인1조이지만 각설이 혼자 타령도 하고 동냥도 하는 1인2역을 맡기도 한다. 먼 옛날 얘기지만 요즘에도 정겨운 용어로 자주 회자된다. 연극무대나 마당놀이에서 복고풍의 애환 어린 각설이, 품바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름한 베잠방이에 쪽박을 찬 타령꾼 각설이와 동냥꾼 품바의 감칠맛 넘치는 장타령과 유머와 풍자엔 웃음이 절로 나오고 서민들의 한(恨)을 흥(興)으로 풀어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각설이 타령과 품바 공연은 보면 볼수록 흥이 나 특히 시골 오일장에서는 각설이, 품바꾼에 정신이 팔려 장보는 것도 잊는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각설이, 품바는 굶주린 백성들의 구걸행각에서 전래된 서글픈 전설이 서려 있다. 뼈저리게 가난했던 시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박 바가지를 들고 고관대작들의 집을 돌며 곡(哭)소리로 밥을 빌어먹던 비렁뱅이(거지)가 풍각쟁이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 당시엔 그나마 바가지에 밥 한술 떠 주는 인정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엔 인심도 사나워져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장터를 돌며 동냥하는 장돌뱅이 각설이와 품바.

8·15 광복 이후엔 각박한 도심지 길거리로 흘러나와 한 푼씩 구걸하는 앵벌이와 양아치로 변신하기도 했다. 양아치란 원래 동냥아치에서 나온 말이다. 6·25전쟁 땐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처럼 미군들에게 손을 내밀며 "기브 미 초콜릿!"으로 변질되었고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면 "기브 미 원 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적인 풍각쟁이의 비조(鼻祖)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86). 요석공주와 사련에 빠져 설총을 낳고 스스로 파계하여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전락했다. 길거리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바가지를 본떠 계율에 묶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뒤집어쓰고 춤추고 노래하며 비렁뱅이로 살았다. 그런 그의 노랫가락이 훗날 생사의 편안함을 깨우치는 화엄경의 무애사상과 일심사상, 화쟁사상으로 승화하였다.

현대판 풍각쟁이 원조는 TV 드라마 '왕초'의 실제 주인공 김춘삼(1928∼2006). 일제 강점기 협객 김두한을 따라다니며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놨으나 6·25전쟁 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전국의 각설이, 품바들을 모아 '거지왕'으로 추대된다. 자활개척단을 조직해 합동결혼식도 주선하고 유휴지를 개간해 자립의 터전을 닦았다.

그 당시엔 봄철만 되면 묵은 곡식이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여물지 않아 서민들은 너나없이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른바 춘궁기. 미국의 구호양곡으로 더러 옥수수 가루가 배급되기도 했으나 먹을 것이 부족해 야산의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겼다고 한다. 그 눈물겨운 보릿고개와 절량(絶糧)농가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을 일으키고 다수확종인 통일벼가 나오면서부터다.

이후 개발경제 시대가 열리고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비약적인 발전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기적을 이뤘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국가안보가 해체되고 서민경제가 파탄난 데다 코로나19까지 기승을 부려 느닷없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춘궁기를 맞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서민들의 심금을 울려주던 각설이, 품바를 비웃기라도 하듯 또 다른 풍각쟁이가 나타나 가뜩이나 힘든 서민들의 속을 뒤집고 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마스크 쓰고 투표하는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표를 구걸하는 가짜 각설이, 품바들이 달콤한 구라를 풀며 애먼 유권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한때 장터나 거리를 누비던 익살꾼 각설이, 품바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에 어깨띠를 두르고 마치 구라경연대회를 펼치듯 한 표 구걸하는 구호가 난무류(亂舞流)를 이루고 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아니라 4년마다 찾아오는 여의도 풍각쟁이다.

요행히 당선되면 여의도에 입성해 보좌관, 비서진에다 인턴까지 거느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입법활동은 커녕 금배지를 만능보검으로 착각하고 내내 피나는 국민세금을 축내며 온갖 특혜와 호사를 다 누린다고 한다. 그러고는 4년 후에 또다시 불쑥 나타나 한 표 찍어 달라고 통사정을 하게 마련이다. 여의도 풍각쟁이가 각설이, 품바보다 거지 근성이 더 강한 이유다.

서민경제가 IMF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거지꼴로 빠져든 것은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한다. 대통령 앞에서 "경기가 거지 같다"고 말한 자영업자가 불경죄 논란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100번 들어도 옳은 말이다. 장마당을 평화로운 웃음판으로 만들며 서민들의 한을 흥으로 풀어주던 각설이, 품바의 유머와 풍자를 언제쯤 다시 보게 될까.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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