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팬텀 스레드' (2017·폴 토마스 앤더슨·미국)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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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15   |  발행일 2020-05-15 제39면   |  수정 2020-05-15
사랑에 관한 매혹적인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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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켰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미운 오리새끼'를 비롯한 안데르센의 동화부터 '작은 아씨들' '몽테크리스토 백작' 그리고 '괴도 루팡' 같은 추리 소설까지. 이야기에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 낯설고 독특하면서도 어딘가 친밀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라면 푹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팬텀 스레드'에는 독특하면서도,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거기에 뛰어난 영상미와 음악, 독특한 미학을 자랑하는 감독, 게다가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놓칠 수 없는 수작이다.

1950년대 영국 런던의 고급 의상실 디자이너 레이놀즈는 시골 식당의 종업원인 알마에게 첫눈에 반한다. 엄격하게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며 최고의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레이놀즈에 비해, 알마는 투박하지만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매력의 소유자다. 알마에게 드레스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애정을 고백한 레이놀즈는 자신의 작업에 영감을 주는 존재로만 인정할 뿐,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갈수록 외면당하는 그녀, 하지만 레이놀즈가 거쳐 온 다른 여인들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질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랑 게임에 알마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승부수를 띄운다.

영화를 보며 나도 몰래 중얼거린 말이 있다. "왜 저 남자를 떠나지 않지?" 무관심으로 냉대하는 남자 곁을 맴도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마는 조금 독특한 '팜므 파탈'이다. 체념하거나 떠나는 대신 남몰래 독버섯을 먹인다. 강퍅하고 예민한 남자가 한없이 약해지도록,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일밖에 모르는 완벽주의자 레이놀즈가 자신의 남자가 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앓고 난 뒤,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결혼에 이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소리친다. 결혼 전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 헤맸다"고 말한 것은 기억에도 없다. 이쯤에서는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풍경이 펼쳐진다. 결국 알마는 선택의 여지 없이 다시 한 번 독버섯을 먹이는데, 여기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것을 눈치챈 레이놀즈가 기꺼이 독을 씹어 삼키는 것(병으로 인한 무력감이 주는 달콤한 행복을 기억했기 때문일 터)이다. 치명적이고 위험한 알마의 사랑을 기어이 완성시키는 것은 레이놀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알마는 한낱 범죄자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또한 알마의 문제적, 치명적 사랑이 아니었다면 레이놀즈는 여전히 일에 파묻혀 여자를 갈아치우며 살다가 쓸쓸히 죽어갔을 것이다. 한마디로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들의 사랑 게임이 흥미진진하다.

상대방이 병이 들게 해서라도 내 곁에 두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위험천만한 것이나, 적어도 이것 하나는 배울 만하다. 전쟁 같은 세상에서 독버섯을 먹듯 치명상을 입고 돌아왔을 때, 푹 자고 쉬며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조용히 간호하는 것 말이다. 사실 각본, 감독을 겸한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이 아팠을 때, 부인이 돌봐줬던 간호의 위력을 체험하고 나서 이 영화를 생각했다고 한다. 낯설지만 어딘가 우리의 모습이 숨어있는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관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팬텀 스레드', 즉 보이지 않는 실이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완성해 가는지 지켜보자. 완성품은 시간이 지나서야 눈에 보이는 법이다.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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