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팔만대장경 전산화 '디지털 환생' 주역 고반재의 종림스님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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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5   |  발행일 2020-09-25 제33면   |  수정 2020-09-25
"시시해지는 세상살이, 콘크리트 절집을 내질렀지"
아나키스트의 본고장 경남 함양에 '영혼의 용광로' 고반재 짓고 은거
단청에 기와 올린 보통 절과 다른 특이한 외관 '갤러리냐' 묻는 사람도
고정관념 깨고 싶은 욕망…속계의 언어는 탈속하더라도 속계의 연장
유튜버의 인문학특강은 결국 지식이란 좀비가 그려내는 자작극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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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망치는 두 길이 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저자거리에서 망치는 방식, 그리고 사람없는 적막강산에서 망치는 방식이다. 전자가 '속계'라면 후자는 당연히 '탈속계'랄 수 있지. 하지만 그 두 진영에서 아무리 성공을 해봐도 결국 '망친 인생' 아닐까?

지금 나는 지리산 오도재의 기운이 석간수처럼 흐르는 경남 함양(咸陽)에 은거 중이다. 76년간 징글맞게 끌고다닌 '종림(宗林)'이라 이름지어진 망쳐버린 한 육신을 붙들고 한가롭게 놀고 있다. 함양, 지명의 속내를 들여다 보니 '세상 양기가 고스란히 모여드는 땅'이란 의미인데 심히 야심만만한 지명이다.

아무튼, 나는 젊어 불가(佛家)란 거대한 샌드백을 난타하면서 '한 깨달음'이란 경지를 엿보다가 어느 날 그게 참 대략난감하기도 해서 수년 전 서울생활 정리하고 여기로 묵행(默行)해버렸다.

누군 이 고장을 '산삼과 죽염의 고장'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 혼령스런 기운이 도사린 곳으로 부르기도 한다. 영·호남의 경계에 서 있는 이 공간은 좀 특별한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 유달리 탐을 낸다. 이 나라에서 한 소식 깨치려는 자는 처음에는 지리산·계룡산·태백산을 떠돌다가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함양에 좌정한다.

내 뼈(속진)를 묻기 위해 여기로 2016년쯤 장귀(壯歸)했다. 내 고향 함양군 안의면. 안의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용추사에서 '제1회 아나키스트대회'가 열렸을 정도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본고장이다. 고반재는 안의면 장자동 무위산 골짜기에 있다. 거기에 '고반재(考般齋)'라 불리는 콘크리트 절집을 지었다. 나도 아나키스트에 물든 모양이다. 단청 입히고 기와 올린 기존 절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반재가 노출콘크리트 건물이다 보니 외관만 보고는 갤러리냐고 묻기도 한다. 고반재는 유교와 불교적 의미를 다 함축하고 있다. '군자가 고반재간에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구절이 '시경'에 나온다. 지혜인 '반야를 생각하는 집'으로도 해석된다. 그냥 온갖 근기의 인간군상을 '덧없음(空)'이란 하나의 버전으로 녹여내는 '영혼 용광로' '영혼 충전소'같은 데라 여기면 된다.

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지. '이것'이다 싶은 건 이미 낡은 것이고 소유욕에 쩔어 있어. 그래서 일가를 이루려면 이것만 갖고는 안 되고…. '저것'도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저것도 이것을 겨냥해 등장한 놈이니 제정신일 리가 만무하지.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것인가? '그것'을 등장시키면 지식쟁이들이 말하는 그 '제3의길'이 되고 말지. 독일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과 같은 구도, 그래서 순환논법에 빠져버리고 말아. 거기까지는 속계(俗界)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속계의 언어가 과연 탈속(脫俗)될 수 있을까? 있다고 장담하는 건 모두 속계의 연장 아닌가. 너무 답답해. 그렇다면 이내 죽어버려야지! 그런데 자살한다고 해서 일이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야.

중질하면 견성할 것 같은데, 견성이란 말만 득세하는 것 같고…. 견성 좇는 자들은 다들 욕망과 욕심의 범주에서 악순환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지금 전국을 쥐락펴락하는 저 유명한 유튜버들. 그네들이 쏟아내는 인문학특강이란 걸 좀 봐. 지식이란 이름의 좀비가 그려내는 자작극 같아. 좀 잘 씨부리면 단번에 광고가 따라붙고, 구글이란 거대한 빅브라더는 AI란 빅데이터를 갖고 전인류 네티즌의 욕망에 딱맞는 실시간 동영상으로 직송해주잖아. 고개 숙이고 너나없이 초록동색으로 앉아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고 있는 광경을 보라구. 누군 문명의 찬가라 하는데 내가 보기엔 '현대판 디스토피아' 같아. 이게 사람사는 세상 맞아?

이미 자본으로 가는 길만 있는 것 같아. 나(자신)로 가는 길은 다 봉쇄된 것 같아.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지적처럼 모두 타자의 욕망을 소비 중이겠지.

인간의 격조가 이런 게 아닌데, 화도 나기도 하고, 세상살이가 갈수록 시시해지는 것 같아 일을 저지르고 싶었어. 그래서 고반재를 주먹처럼 내밀었지. 내, 참~ 잘~ 했지?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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