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난세에 영웅 난다고…

  •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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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9   |  발행일 2020-09-29 제22면   |  수정 2020-09-29
신문보기 겁났다던 靑 참모
대통령 되곤 신문 끊었는지
사안마다 유체이탈 화법만
반면 與 사퇴압박 감사원장
원칙대로 靑감사 부활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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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논설위원

가끔 작고하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 로비에서 연 출입 기자들과의 송별회가 떠오른다. 노 대통령이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겠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이제는 화장을 안 해도 되어서 너무 좋다"라고 하신 말씀이다. 외모 꾸미기에 별반 관심이 없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방송을 위해 거의 매일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것이 고역이었던 듯했다. 기억 속의 한 장이 이번에 다시 생각난 것은 당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노 대통령 옆에 서 있는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 때문이다. 기자들이 문 실장에게도 떠나는 소회를 한마디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조간 신문을 들면서 맘을 졸이지 않게 되어서 너무 좋다. (취임 후 지금까지) 매일 아침 또 무슨 기사가 터졌나 조마조마하며 지냈다'라고 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일성이 언론과의 전쟁이었다. 퇴임 직전에는 정부 각 부처 출입기자실 폐쇄를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노무현의 청와대'가 임기 내내 언론에 대해 그립(grip·움켜 쥠)을 드세게 잡았지만, 한편으로 매일 아침 가슴 졸일 정도로 보도내용에 신경을 썼던 것을 문 실장은 고백했던 것이다.

아침신문 들기가 겁이 났다던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어떨까. 청와대 비서실을 총괄하는 사람은 가슴 두근거려도 홍보수석실에서 정리한 모든 전국의 조간신문 목록과 주요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특히 그날 이슈가 될 만한 기사와 칼럼은 챙겨 읽어본다.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제목이어도 말이다. 그리해야 대책이 나오고, 대통령을 잘 보좌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다르다. 보기 싫으면 안 보고, 읽기 싫으면 안 읽으면 된다. 이 정부 들어 많은 이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을 지적하고 있다. 주요 사안마다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사돈 남 말 하듯이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론 스트레스'를 심하게 겪었던 청와대 참모 출신인 대통령이 신문읽기를 끊었기 때문은 아닐까. '청와대 사이트'에 올라간 진인(塵人) 조은산, 영남만인소 등 최근 도탄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쓴 '상소문'은 읽었을까?

필자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피와 땀을 쏟은 갑남을녀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그런 가운데서 외로이 법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공직자까지 만나게 되었다. 최재형 감사원장이다. 움츠렸던 가슴이 한결 펴지는 느낌이다. 최 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2003년부터 제외되었던 대통령 비서실·경호처·국가안보실을 2018년부터 감사 대상으로 부활시켰는데 올해부터는 4개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까지 감사 대상으로 부활시켰다. 최 원장은 앞서 한국수력원자력의 월성1호기 원자력발전소 조기 폐쇄 결정 감사와 관련해 여권 인사들로부터 자진 사퇴 및 탄핵 압박을 받았다. 월성원전 조기 폐쇄 결정이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감사원 결론이 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돌아가는 형국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경우와 비슷하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앞세운 여권의 집요한 공세로 윤 총장은 이미 식물 총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은 이제 최재형 감사원장을 주목하고 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회창 감사원장을 '대쪽'이라는 별칭을 얻게 해 결국 대통령 후보로 만든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최 원장이 난세의 영웅으로 커 갈 것인지, 그저 소임을 다한 공직자로 남을 것인지 여부는 문 대통령에게 달렸다. 때릴수록 크는 법. 신문을 보기 싫다면 사이버 공간의 수많은 소리라도 듣기를 문 대통령께 권하고 싶다.
이영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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