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고아성 "이제껏 내가 닮고 싶고 존경하는 사람 연기해"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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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30   |  발행일 2020-10-30 제39면   |  수정 2020-10-30
"상고출신 대기업 사원 완벽하지는 않지만 씩씩한 모습에 매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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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보다 대리 진급이 목표인 이자영은 삼진그룹 생산관리 3부에서 일하는 경력 8년차 베테랑 사원이다. 부푼 꿈을 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상고 출신이라는 한계로 커피 타기와 서류 정리 등 잔업만 도맡고 있다. 그가 토익 600점을 넘기면 고졸도 대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그는 회사가 이를 덮으려 하자 현실과 타협하기보다 내부고발자가 되기로 한다.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일과 직장을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고졸 출신 입사동기 유나(이솜)와 보람(박혜수)이 있어 든든하다. 고아성이 좀 더 당차고 단단해진 모습으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하 '삼진')의 이자영을 연기했다. 조직 안에 편입하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어찌 보면 직장 내 '을'의 위치에 있는 고졸 말단 사원 자영은 세상을 지키는 건 뛰어난 한 개인이 아닌, 평범한 이들이라는 사실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최근작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2018),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2019)로 이어지는 정직하고 올바른 캐릭터다. "나름의 신념은 있어요. 내 가치관에 부합하는 걸 하고 싶고, 그게 전면에 드러나진 않더라도 캐릭터에 우러났으면 하는 거죠." 그렇게 고아성은 자신이 닮고 싶고, 존경하는 인물과 마주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단단한 심지에 걸맞게 이를 추구해왔던 그는 '사람은 다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빛난다'라는 평범하지만 의미 있는 가치를 보여준 자영을 통해 또 한 번 열정과 에너지를 불태웠다.

경력 8년차 베테랑 사원
커피타기·서류정리 잔업뿐
토익 점수 600점 넘겨야
대리로 진급 할수 있는 희망
개성있는 캐릭터 여성 3인방
직장내 차별·폐수 유출 고발
1990년대 시대상 표현 걱정도
내성적인데 외향적 된것 같아
캐릭터에 맞는 연기하려 노력
아역부터 조금씩 성장한 듯


▶실존 인물의 고뇌와 고민들을 담아냈던 전작 '항거:유관순 이야기'와 달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주했을 것 같다. 하지만 꿈을 포기하고 내부고발자가 되기로 한 이자영 역시 많은 고민과 갈등을 표현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 어떤 모습이 담기길 바랐나.

"시종 묵직한 느낌이었던 '항거'와 달리 '삼진'은 뭔가 든든한 결속력이 현장에 있을 때마다 느껴졌던 작품이다. 세 주인공은 오지랖(자영), 싸가지(유나), 수학왕(보라)이라는 각자 뚜렷한 개성이 있다. 특히 자영이는 개성 있는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직장 내 부당한 차별에 대항하고 폐수 유출사건의 진위를 보여줘야 한다. 관객들과 함께 사건을 목격하고 결국에는 내부고발까지 가는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인물의 개성보다는 사건과 보조를 맞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이 함께했고 많은 조력자가 등장하면서 우정과 연대, 그리고 이를 통해 얻어지는 성장의 뿌듯함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 모습이 잘 담기길 바랐다."

▶자영이 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타심과 오지랖 때문이다. 그와의 실제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까지 나는 되게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좋아하지만 내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거나 리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영을 연기하려면 나부터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촬영현장에서 에너지를 끌어 올렸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예전의 나라면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행동이다.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극 중 캐릭터에 맞게 성격이 바뀌곤 했지만, 이번처럼 끝까지 유지가 된 적은 없었다. 지금도 외향적으로 바뀐 나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웃음)

▶여성 서사의 특장을 잘 살린 세 사람의 호흡이 좋았다.

"호흡도 좋았지만 나이가 다르고 연기하는 스타일이 다른 세 사람이다 보니 흥미로움의 연속이었다. 솜이 언니가 나보다 두 살 많고, 혜수는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 나는 애드리브를 정말 못하는데 언니는 항상 애드리브를 준비해오고 그걸 다 매끄럽게 표현한다. 매번 포즈가 딱딱 나오는 걸 보면서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혜수는 도통 무얼 하는지를 모를 만큼 늘 지속적으로 작은 움직임을 보여줬다. 연기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카메라를 보게 되면 그의 움직임이 다 이해되고 읽힌다. 너무 신기했다."

▶박혜수 배우가 그러더라. 첫 미팅에서 눈에 꿀이 떨어지는 것처럼 나를 반갑게 바라봤다고.

"숨길 수 없었나 보다.(웃음) 빈말이 아니고 혜수 배우를 너무 좋아한다. '청춘시대' '스윙걸즈'를 보면서 반했다. 혜수의 연기는 볼 때마다 그가 되게 멋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게 만든다. 되게 담백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정말 멋있다. 그런 그를 한 작품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너무 반가워서 처음 미팅 때 그의 곁에 굉장히 가까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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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미덕은 세 캐릭터의 개성과 역할 분담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폐수 방류 사건을 파헤쳐가는 과정에선 세 사람뿐 아니라 회사 내 여성들이 연대했고, 나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까지 합심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기를 하면서도 뿌듯한 감정이 들었을 것 같다.

"정말 그랬다. 비록 연기지만 상황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절로 극에 몰입돼 감정이 쌓일 때가 있다. '삼진'을 찍고 나서 진짜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도 이 영화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정말 많겠구나 싶었다. 시대극이기도 하고 공간이 주는 영향이 컸기 때문인데, 삼진그룹은 대한민국 최고기업이라는 설정답게 화려한 장식에 크고 으리으리한 구조가 처음부터 모두를 압도했다. 사건을 추리할 때 헤집고 다녔던 서울 을지로의 낡고 허름한 골목들과도 확연히 비교됐다. 그런 공간 전환이 연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또 현장에서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이 많다 보니 매번 뜨거운 기운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영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고졸이라는 한계로 능력과 상관없이 직장 내에선 잔업무만 맡고 있다. 그 시대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일 텐데 어떤 점에 주목했나.

"환경적으로 보면 그간 내가 맡았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물론 1992년도에 태어난 내가 당시의 분위기와 느낌을 제대로 알고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간혹 생각나는 풍경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삐삐는 생소하지만 동전을 넣는 공중전화는 카페나 음식점에 한 대씩 놓여 있는 걸 본 기억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자영은 자기 일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극 중 전화를 받을 때나 행동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고, 직장 상사들의 지시나 부탁에도 성심성의껏 임했다. 사내 토익반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장면도 나름 신경을 쓴 대목이다. 자영은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단계이기 때문에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순 없지만 대리진급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실력 이상의 것을 표현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부담감은 없었나.

"이솜·박혜수 배우가 있어서 연기적 부담감은 덜 했다. 다만 연기 외적으로는 90년대 시대상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좀 했다. 촬영에 앞서 당시에 맞게 분장과 헤어, 의상을 입어 본 적이 있다. 거울을 봤더니 내가 유년기 시절 처음 인지했던 직장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와 잔상이 떠오르더라. 할머니 댁에 놀러 갔을 때 퇴근하고 돌아온 이모들이나 거리에서 숱하게 봤던 직장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90년대가 과거이긴 하지만 아주 먼 과거는 아니기 때문에 당시를 기억하거나 실제 비슷한 경험을 하셨던 분들이 많다. 그 부분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있다."

▶연출을 맡은 이종필 감독을 무척 믿고 신뢰한다고 말했는데 어떤 점에선가.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에서 80년대 여경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와의 차이점을 두기 위해 노력을 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드라마에서 보여준 모습을 답습하게 될까 봐 우려됐다. 그런 고민을 감독님에게 털어놓았는데 드라마 전편을 다 보신 후 리뷰까지 적어서 보내주셨다. 그리고 내가 답습하지 않도록 알아서 잘 잡아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정말 세심하고 배려가 깊으셨다. 또 촬영 중에는 매일 아침마다 그날 찍을 분량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을 적어 배우들에게 일일이 전달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확신과 방향성이 분명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별다른 굴곡 없이 아역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극 중 대사처럼 '어제보다 발전된 오늘의 배우 고아성을 늘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못 하는 편이다. 그래서 누구한테도 '힘들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연기자이니까 내 개인적인 생각과 상태보다는 캐릭터에 부합되는 모습을 작품에 담아내려고만 했다. 그게 (연기자의)본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작품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20대가 끝나는 현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은근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통해 스펙트럼 넓은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의도치 않게 내가 닮고 싶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주로 연기했더라. 자영도 마찬가지다. 완벽하진 않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씩씩하게 파이팅하는 그 친구를 닮고 싶어 했다. '왜 일을 하는 걸까,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곳에서의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자영의 대사가 개인적으로 되게 뭉클했다. 나 또한 연기를 잘하고 싶지만 그건 내 연기를 봐주시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많은 분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재밌고, 행복했다'라고 말하셔서 나 역시 행복하다. 아주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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