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도 많다"에서 "제발 낳아달라"…40년 만에 뒤집힌 패러다임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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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15   |  발행일 2021-01-15 제34면   |  수정 2021-01-15
다시 살펴보는 시대별 인구정책
60년대 빈곤해결 위해 가족계획사업 시작
70년대 불임수용 가정에 '공공주택입주권'
80년대 다자녀 과세…인구억제 정책 효과
외환위기 이후 출산율 급감…저출산 지속
최근 고령화 시대 맞아 삶의 질 향상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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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0~50년대 "5명은 낳아야"   
그렇다면 인구 데드크로스를 맞기까지 한국은 시대별로 어떤 인구정책을 펼쳤을까.

◆1940~50년대 "3남2녀로 5명은 낳아야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대체로 5~6명대, 높으면 7명대 정도의 출산율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 해방 당시 한반도 인구는 약 2천500만명으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특히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해외로 유출되는 인구가 많았다.

1945년 해방 이후 1946년까지는 일제시대 후반 착취와 강제 징용 등의 악영향으로 출생아 수가 50만명대로 감소했으나 1947년부터 출생아 수가 70만명 안팎으로 급증했고 해외로 이주했던 교포들도 대거 귀국하면서 연 4%대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율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대 전반기에는 6·25전쟁의 여파로 출생아 수가 1950년에 60만명 초반대로 소폭 감소한 것을 빼면 1953년 휴전 때까지 70만명 안팎으로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망률이 급증했기에 인구증가세가 대폭 감소했다. 이후 결혼과 베이비붐으로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높아졌다.

당시 '가족계획사업'은 국가 차원이 아닌 개인 연구소나 해외 선교사를 통해 이뤄졌다. 국가적으로 사업을 진행한 것은 1960년대 제3공화국이 '경제개발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부터다.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3명만 낳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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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인구 증가를 조절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지만 쉽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남아선호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1963년 보건사회부와 경제기획원은 가족계획사업 '10개년계획'을 수립한다. 목표는 인구 증가율을 1960년 3.0%에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종료되는 1971년까지 2.0%로 낮추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을 '적게 낳아 잘 기르자'는 소(小)자녀관으로 유도해야 했다. 당시에 나왔던 대표적인 대국민 가족계획캠페인 표어로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세 자녀 갖기 운동' '3.3.35 원칙'(세 살 터울로 35세 이전에 3명까지 출산) 등이 있었다. 이 같은 정부의 개입 덕분(?)에 출산율은 1960년 6.16명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4명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1970년대부터는 사회지원책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3자녀 이하까지 종합소득세 인적공제 제한,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는 가족법의 개정, 2자녀 불임수용가정에 공공주택입주 우선권 부여 등을 내놓았다.

1970년대 중·후반 들어 산아제한 정책이 오일쇼크와 겹쳐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면서 출산율이 2명대에 진입했다. 이 시기에 출생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형제 수가 2~3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출생아 수도 100만명 선에서 80만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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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90년대 "둘도 많다"   

◆1980년대 "둘도 많다", 그리고 1990년대

1980년대 당시 정부는 '합계출산율을 2.1명으로 낮춘다'는 목표를 설정했지만 달성에 실패했다. 2.8명으로 집계됐다. 베이비붐 세대의 출산기였고 남아 선호사상이 여전히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출생아 수가 계속 80만명 중·후반대를 넘어서자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대폭 강화했다. 1인 자녀에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다자녀 가정에는 주민세와 의료보험료를 추가 부담시켰다. 가족계획을 실천하는 가정에 줬던 혜택은 △공공주택 입주 우선권 △자녀에 대한 보건소 진료 무료 △영세민에 대한 특별생계비 지급 등이 있었다. 다른 시대보다도 자녀계획에 대한 홍보 표어가 많았다. 당시에 나왔던 캠페인 표어들을 모아 보면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둘 낳기는 이제 옛말 일등국민 하나 낳기' '여보! 우리도 하나만 낳읍시다' '하나 낳고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 '한 가정 한 자녀 사랑가득 건강가득' 등이 있다. 강력한 인구증가 억제정책으로 1983년 합계출산율아 2.1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1985~1995년에는 1.7명 내외의 낮은 출산율을 유지했다. 1990년대 들어 산아제한정책이 이전보다 다소 완화돼 둘째 혹은 셋째를 가지는 가정이 잠시 늘어났으며 인구 증가율이 다시 1%를 넘어서기도 했지만 일시적이었다. 그나마도 IMF 외환위기 이후로 취업연령의 상승으로 출산율이 급속히 감소됐다. 1990년대 이후 권위주의가 점차 사라지고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한 개인주의가 등장하면서 일부 기혼자들은 불임·난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공개하는 일이 급증했다. 각종 환경 오염과 환경호르몬, 사회 진출 연령대의 상승, 만혼 현상 증가, 이혼율 증가 등으로 자연스럽게 저출산이 심화됐다. 개인주의 문화가 증가하면서 불임·난임에 대한 편견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억제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경우 장기적으로 사회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고 정책은 급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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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동생 낳아줘"   

◆2000년대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심각한 저출산 기조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연대다. 2000년 '밀레니엄 베이비'라고 해서 출산율이 소폭 늘었으나 2001년부터 저출산이 심각해졌고 2005년에는 출산율이 1.08을 기록했다. 황금돼지해라는 속설이 퍼지던 2007년에는 출산율이 1.25명까지 반짝 치솟았지만 2009년 세계금융위기 여파로 1.14명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2010년에는 백호랑이해 출산 붐으로 출산율이 전년 대비 0.08명이 오른 1.23명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2011년에는 2010년 월드컵 베이비 붐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24명으로 더 올라갔고 2012년에는 흑룡해라는 속설로 출산율이 1.30명을 기록, 2001년 이후 11년 만에 최고 출산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2013년 출산율은 1.19명으로 곤두박질쳤다.

2014년에는 1.21명, 2015년에는 1.24명으로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반짝 회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7년 전체 출생아 수는 2016년 대비 약 12% 감소한 35만7천771명으로 당초 2030년 전후로 예측했던 40만명선 붕괴가 무려 13년이나 빠르게 다가왔다. 2019년 연간 출생아 수는 30만2천676명이며 합계출산율은 0.92명을 기록했다. 2017년 40만 명대가 붕괴된 지 2년 만에 30만 명대를 턱걸이했다.

2000년 이후 내내 이어진 저출산 정책은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2017년에 들어선 문재인정부는 저출산에 대한 관점을 바꿔 기본의 '출산율을 목표치로 올리기'에서 '삶의 질'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적응하기'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펼쳐도 추세를 돌리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결국 인정한 것이다. 출산율 올리기보다 저출산과 고령화에 경제를 적응시키고 사람들이 일과 가정에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사회 구조를 뜯어고치는 방안에 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도움말=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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