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여행]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철마 떠난 철교, 추억만 남은 옛 나루…시간이 멈춘 듯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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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5   |  발행일 2021-03-05 제13면   |  수정 2021-06-2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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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 나루터에서 바라본 삼랑진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낙동강 철교로 1905년에 개통돼 1962년 말까지 사용되었다.

세 개의 물길이 만난다 하여 '삼랑(三浪)'이라 했다. 창녕 남지를 지나온 낙동강과 밀양 시내를 통과해온 밀양강, 그리고 낙동강 하굿둑이 건설되기 전 저 남쪽 바다로부터 역류해 온 바닷물이 여기서 만났다. 또 인근 여섯 고을의 곡식이 이곳에 모였다. 그것은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갔다. 호남의 3대 조창 중 하나가 있던 곳이 삼랑진의 삼랑리였고 숱한 사람과 물자가 들고 나던 중심지였다. 20세기 초에는 철길이 놓였다. 경전선과 경부선이 개통되었고 역이 생겼다. 그러나 역이 들어선 곳은 삼랑리가 아닌 이웃마을 송지리였다. 삼랑리 옛 나루터에서 바라본 강은 큰 물길이었다. 큰 물길 위로 오래된 철교가 달린다. 한때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전속력으로 가로질렀던 다리는 이제 느리게 달린다. 생각 많은 산책처럼 천천히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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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리 하부마을의 낙동 나루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운의 요충지였다.

◆큰 나루가 있던 마을, 삼랑리 하부마을

삼랑진 삼랑리에는 5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낙동 강변을 따라 하양, 하부, 상부 마을이 위치하고 하부마을의 내륙 쪽에 내부마을, 밀양강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마을들과 뚝 떨어진 자리에 거족마을이 있다.

옛 나루터는 삼랑리의 자연부락인 하부마을에 위치한다. 낙동 나루터 혹은 삼랑진 나루터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낙동 나루는 김해와 마주보며 경상 좌도의 영남대로와 연결되는 수운의 요충지였다. 영조 41년인 1765년에는 삼랑창이 설치되었다.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등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가 삼랑리로 모였고 마을은 물자의 최대 집산지로 성장했다.

하부마을회관이 바라보는 강변에 옛 나루터 자리를 알리는 전망대가 있다. 두껍고 넓게 펼쳐져 있던 잿빛 구름이 흩어지며 조금씩 파란 하늘을 드러내는데 너른 강물은 초록을 한 방울 머금은 회색이다. 나루터에서 오른쪽 하늘과 강물 사이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낙동강 철교가 놓여 있다. 하부마을의 왼편 끄트머리에서 김해 생림면의 마산포를 연결하는 다리, 1905년에 개통된 경전선 '삼랑진교'다. 저 철도가 놓이면서 낙동 나루와 조창은 폐쇄되었다. 철도건설과 함께 일제가 추진한 것이 황무지 경영이다. 그들은 자국의 식량 및 원료 문제를 해결하고 자국민의 부동산 소유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자연 상태로 이용되던 소위 황무지 또는 미간지를 개간하고 합법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바로 그때 밀양강 하류의 저습지대가 일본 근대자본에 의해 개간되었다. 광대한 농장이 만들어졌고,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는 환경에 서식하던 갈대는 연료, 사료, 공예품 원료 등으로 철길을 통해 팔려나갔다.


세 물길이 만나 '삼랑'으로 불려
하부마을 나루터 수운의 요충지
일제강점기 철도 놓이면서 폐쇄

1905년 개통된 경전선 삼랑진교
1962년까지 사용후 지금은 차도로
하양마을 낙동강역 2010년 사라져



마을에는 '삼랑리 이달주 가옥'으로 불리는 적산가옥이 있다. 194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2층 구조로 전체적인 모습은 유지하고 있다. 삼랑진 119소방서 옆에는 옛 소학교 건물이 남아 있다. 192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2층 건물이다. 당시 1층은 교실과 창고, 2층은 교실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현재 1층은 주택으로 개조하여 주민이 살고 있다.

삼랑진교는 1962년 말까지 사용되었고 이후부터 차도로 이용되고 있다. 다리 너비가 4.3m에 불과해 차량 두 대가 몸을 사리며 겨우 비켜갈 수 있고 일정량을 넘기는 무게와 높이의 차량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지금 다리는 일명 '낙동강 인도교' 또는 '삼랑진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린다. 자동차보다는 걷는 사람, 자전거 탄 사람이 더 많다. 2003년 영화 '똥개'에서 주인공 철민(정우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 다리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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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착공해 1962년에 준공된 낙동강 철교. 지금은 김해 레일바이크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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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 다섯 형제가 노닐던 곳. 왼쪽 앞에 삼강사비. 뒤 왼쪽부터 삼강서원, 삼강사, 관리사인 압구정.

◆역이 있던 하양 마을, 삼랑루가 있던 상부마을

옛 나루터에서 왼쪽에 보이는 철교는 '낙동강 철교'다. 1935년에 착공, 1962년에 준공되어 삼랑진교의 바통을 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철교의 하부는 일본인이, 상부는 미군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김해 레일바이크로 이용되고 있다. 이 다리의 동쪽이 하양마을이다. 마을에는 낙동강역이 있었다. 1906년 보통역으로 시작하여 2010년 1월에 여객열차가 중지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역사가 철거되었다. 역이 하도 예뻐 삼랑리의 명소였다고 전해진다.

마을에는 '장주복 가옥'이라 불리는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건물이 남아 있다. 1930년대에 지어져 일본인이 살았으며 광복 후 한국인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강변에 4대강 자전거 종주 길의 한 구간인 '은빛 물결길'이 환하고 둑 사면에는 복사꽃이 피었다.

삼랑진교 오른쪽으로 강변의 좁은 벼랑길을 고개 넘듯 내려가면 2010년 새로이 놓인 경전선철길 아래에 상부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인 후포산을 뒤기미 또는 뒷개뫼라 부르는데 그 산자락에 중종 때인 1510년 여흥민씨(驪興閔氏) 다섯 형제가 공부하며 자연을 즐겼다는 오우정(五友亭)이 있다. 1563년에는 지역 선비들이 오우사(五友祠)를 지어 그들의 우애를 기렸으나 이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탔다. 오우사는 1702년 삼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고 영조 때인 1775년에는 형제들의 우애와 효행을 기록한 삼강사비가 세워졌다.

대문 틈 사이로 삼강서원을 들여다본다. 마루에 오우정 현판이 걸려 있다. 뒤돌아서면 경전선 삼랑진 철교와 삼랑진교가 강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인다. 오우정 자리에는 원래 삼랑루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승려 충지가 묘사한 누각과 강변의 모습은 더 없는 그림이다.

'호수 위에 푸른 산이요, 산 위에 누각일세 / 아름다운 이름이 물과 함께 길이 흐르네/ 모래톱 주막들은 달팽이 껍질처럼 늘어섰고 / 물결 쫓는 배들은 익새 머리로 춤추네.'

상부마을은 뒤기미 마을이라고 불린다. 마을 북서쪽 밀양강변에는 상남면 동산리를 연결하는 나루가 있었다. 뒤기미 나루라고도 하고 오우진(五友津) 나루라고도 했다. 여지도서에는 오우정진(五友亭津)이라고 되어 있다.

'뒷기미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 데 마중 갈까나/ 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 뒷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 임올랑 보내고 난 어찌 살라노/ 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

나루도 사라지고 분주함도 사라지고 이제 나루터에 전해져 오던 구성진 가락도 희미해져 간다. 그러나 오늘도 부러 찾아든 외지인들이 강변 횟집들의 문을 두드린다. 은어, 잉어, 향어, 숭어, 메기, 붕어, 구성진 가락이 열린 문 사이로 고소하게 쏟아진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Tip

대구부산고속도로 삼랑진IC로 나가 삼랑진로를 타고 삼랑진읍으로 간다. 송지네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하양, 하부, 상부마을이 차례로 이어진다. 하양마을의 금융조합 건물은 삼랑6길 56, 하부마을의 이달주 가옥은 삼랑4길 12, 삼랑진 소학교 건물은 삼랑진 119소방서 뒤편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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