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인문학〈중〉 요리 변천사 1...밤의 허기 채워주는 대구의 '소울 푸드'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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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09   |  발행일 2021-04-09 제33면   |  수정 2021-04-0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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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역의 돼지요리는 수육과 국밥에서 벗어나 '연탄석쇠돼지불고기' 시대를 개막시킨다. 맨 먼저 칠성시장에서 태어났고 이후 북성로에서 꽃을 피운다. 전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대구만의 맛이었다. '밤의 허기'를 충족시켜주었던 연탄불고기. 그 현장을 아슴프레하게 간직하고 있는 칠성시장과 북성로의 불맛. 그건 모든 계층과 소통했던 정말 재밌는 '소울 푸드(Soul food)'였다.


돼지고기. 다소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고사·제사용 식재료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6·25전쟁을 넘어서면서 경상도에선 유달리 돼지국밥이 '국민 한 끼'로 등극한다. 그 국밥 옆에는 수육과 순대가 함께 따라다닌다. 그 수육은 국수와 매칭되기 시작한다. 그 연장이 바로 제주도 고기국수, 부산 평산옥의 돼지국밥, 대구의 암뽕국수 등이다.

그런데 1970년대 들면서 세상 입맛이 새콤달콤해진다.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주자가 바로 '돈가스'와 '보쌈'이다.

50~60년대 경상도 대표음식 돼지국밥
서성로 돼지골목, 수육으로 이름날려
고사용 돼지머리는 칠성시장 '독점'
머릿고기 누른 편육, 잔치 필수음식

70년대 조미료 '자극적 맛' 섞이면서
대구만의 불맛 연탄석쇠불고기 탄생
칠성시장서 시작, 북성로서 꽃피워
양념갈비·찜갈비·찌개…맛의 분화
80년대 '요리 종결자' 삼겹살 등장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양념이 가미되고 연탄석쇠 불맛까지 섞이게 된다. 돼지요리가 모던하고 다양하게 분화된다. 그 속을 '족발신드롬'이 파고든다. 중식당에선 오향장육과 탕수육이 인기를 끈다. 연이어 돼지불고기, 돼지찜갈비, 돼지찌개, 돼지김치찜, 나중엔 돼지껍질구이 등도 가세한다. 1980년대가 끝나갈 즈음, 프로야구 붐 등과 맞물려 돼지고기요리의 종결자로 불리는 삼겹살 시대가 개막됐고 이후 그 열기는 식지 않고 30여 년간 세몰이 중이다. 냉동 대패삼겹살에서 생삼겹살, 재차 제주도 근고기 버전의 스테이크 같은 두툼 삼겹살 등으로 진화된다.

대구 돼지요리의 역사도 그런 궤적을 그려내며 성장해 왔다. 광복 직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는 국밥보다는 '수육 전성시대'였다. 수육은 몸통과 머릿고기 스타일로 나눠진다. 머리로 만든 수육은 흔히 편육으로 불린다. 상어 피편처럼 생긴 편육은 만드는 과정이 특별났다. 일단 돼지머리를 솥에 넣고 살이 허물허물해질 때까지 삶는다. 뼈와 살코기를 분리한 뒤 살코기는 삼베 보자기에 싼 뒤 압축기에 넣고 압력을 가한다. 그렇게 하루 정도 묵히면 젤리처럼 어린다. 그걸 일일이 자르면 편육이 되는데 남성보다 여성이 더 좋아했다. 잔치 음식에는 필수였다.

광복 직후 대구에서 가장 핫한 수육골목은 단연 중구 서성로였다. 그걸 축으로 서문시장, 칠성시장, 염매시장, 중앙시장, 방천시장, 명덕시장, 봉덕시장 등 곳곳의 전통시장을 끼고 국밥집이 생겨난다. 국밥집은 수육집을 겸했다.

서성로 돼지골목은 1950~60년대가 1기, 1970년대 이후 생겨난 2기 식당으로 나눌 수 있다. 1기 대표주자는 '서성식당'(주인 정순연)이다. 이밖에 순대, 수성, 김천, 대구 등 5개 식당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장사를 했다. 대구식당(서영희)은 이후 1960년대 서 사장의 차남 이창태(78)씨가 '밀양식당'으로 상호를 바꿔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가업을 잇고 있다. 이후 8번식당(김희자)과 이모식당이 가세하면서 '서성로 3인방 돼지국밥집'이 형성된다. 1976년 오픈한 8번식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진다. 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고향인 합천을 방문할 때 이 집 고기를 갖고 간 덕분이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축산산업이 열악했다. 골목 안에서도 공공연하게 밀도살이 이뤄졌다. 식당주들은 내당동 우시장에서 돼지를 구입해 성당동 도살장에서 잡은 뒤 서성로로 갖고와 해체작업을 했지만 단속이 소홀하면 가게에서 돼지를 잡았다. 가마니 위에 돼지를 뉘어놓고 모두 6등분(그 바닥에선 '육각 친다'고 했다) 냈다. 앞다리 2개, 뒷다리 2개, 갈비짝 2개.

참고로 지역의 고사용 돼지머리는 칠성시장 족발골목이 독점하다시피했다. 상당수 단골은 당연히 무속인이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역의 돼지요리는 수육과 국밥에서 벗어나 '연탄석쇠돼지불고기' 시대를 개막시킨다. 칠성시장에서 태어났고 이후 북성로에서 꽃을 피운다. 전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대구만의 맛이었다. 연탄불고기와 쌍벽을 이루는 또 다른 돼지불고기 식당이 있다. 1970년대 중반 현재 노보텔 대구 뒤편에서 오픈한 '팔군식당'이다. 소불고기 전성기를 구가한 '계산땅집'과 쌍벽을 이룬다. 이 흐름을 타고 등장한 두 업소가 있다. 대구역전 '국일불갈비'와 남구 대명동 앞산네거리 근처 '대원돼지숯불갈비'다. 국일불갈비는 연탄으로 바싹하게 구워낸다. 대원은 대구의 첫 돼지갈비구이집으로 평가된다. 이밖에 남부정류장 근처에서 태어난 '미정'은 '한방양념돼지구이'를 개발해낸다. 그 흐름을 계승한 게 서구 크리스탈호텔 뒤편에 있는 '김태근 한방돼지갈비'다. 대구조리사협회장을 역임했던 김 사장은 한방요리 대중화에 헌신했고 특히 한방돼지갈비 특허권도 소유하고 있다. 또한 들안길로 옮겨 승승장구하고 있는 김재동의 '서민갈비'도 양념돼지갈비의 고수로 인정받고 있다.

'밤의 허기'를 충족시켜 주었던 연탄불고기. 그 현장을 아슴프레하게 간직하고 있는 칠성시장과 북성로의 불맛. 그건 모든 계층과 소통했던 정말 재밌는 '소울 푸드(Soul food)'였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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